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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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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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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BY 낙서쟁이 2000-11-30


이야기 [열 일곱].....약속

집에서 나올 때 이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희는 집어들었던 우산
을 현관입구에 다시 내려놓고 집을 나섰었다. 그런 세희의 빈손을 본
승빈이 버튼을 눌러 자동우산을 활짝 펴서 세희의 머리 위를 가려주
었다.

"선생님. 저..... 시간이 늦었지요?
"전 괜찮습니다."
"그럼.... 조금 걸어도 될까요? 걸으면 술도 좀 깰 것 같고...."
"그러시죠."

한 우산아래 두 어깨가 살짝살짝 스치고 있었다. 세희쪽으로 받쳐
들은 우산을 타고 내려온 빗물들이 승빈의 오른쪽 어깨를 적시고 있
었다.

"선생님 옷 다 젖겠어요."

세희가 손잡이를 몇 번 승빈쪽으로 밀어놓았지만 번 번히 우산은
세희 머리 위로 돌아와 있었다. 순간순간 지나가는 차들의 소리와 빗
소리만 이어지고 있었다.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은 편안한 시간 이였
다. 얼마나 걸었을까? 비에 젖은 세희의 원피스 자락이 다리에 감기
고 있었다.

"선생님. 바다가 보고 싶어요. 후후... 우습죠? 갑자기 바다라니..."
"우습긴요. 정말 이 시간 비내리는 바다는 또 다른 멋이 있겠네요."
"바다는 아니지만. 한강에 가실레요?"
"지금 바다에 가기엔 어렵겠군요. 그러죠. 한강에 가시죠."
"택시를 건너가서 타야 해요."
"후후.. 제 차로 가세요. 전 술 안 마셨습니다."

세희는 혼자서 술을 마시며 이 남자를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에 더
욱 미안해 졌다.

서행으로 달리는 차창에 빗물이 부서지고 있었다. 비오는 날의 늦
은 시간 한강은 조용했다. 케니지 섹스폰 연주 음악에 세희가 젖어
들고 있을 때 한강 마저 빗물에 젖고 있었다.

"세희씨. 저.... 이야기 하나 해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전 3남 1녀의 차남입니다. 1녀는 누님이죠."
"네."
"누님은 미인이었죠. 학창시절 메이퀸까지 할 정도였죠. 그런 누님
이 있다는 것이 뿌듯할 정도였습니다. 누님은 마음까지 착했었습니다.
어린 시절 늘 싸우던 형과는 달리 언제나 따뜻하고 자상했죠. 부모님
들에게도 누나는 자랑스러운 딸 이였습니다. 맏딸이자 외동딸인 누나
를 어머님은 나이가 들수록 친구처럼 든든해 하셨고, 아버님은 언제
나 예뻐 하셨죠."
"아.. 언젠가 말씀 하셨던 그 누님이신가요?"
"네. 세희씨와 닮은 부분이 많은 누나죠."
"외모는 빼고요. 후후.."
"아닙니다. 외모까지 많이 닮았습니다. 아무튼 그런 누나가 시집갔
을 때 전 한동안 아쉬워하고 보고 싶어했었습니다. 부모님은 더 하셨
었겠죠."
"네. 그러셨을 거예요."
"그런 누나가 신혼 무렵 어느 날 얼굴과 몸에 멍이 들어 친정 집에
왔었습니다. 모두들 경악했었습니다. 부모님이 달려가 매형을 야단쳤
고, 누나는 몇 일간 쉬다가 돌아갔었습니다. 그 뒤로 누나가 그런 모
습으로 친정 집에 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세희의 숙여진 고개가 창밖으로 돌려지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정말."
"그러나 일년에 몇 번 집안 행사때 잠깐식 보는 누나의 얼굴은 행
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곱고 예쁘던 얼굴에 미소가 사라져 갔습
니다. 부모님이 매형을 나무라고 돌아오시고, 그 뒤 누나가 집으로 돌
아갔을 때 누나는 더 심하게 맞았었나 봅니다. 그 뒤로 누나의 우울증
증세가 보였습니다."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누님 지금은 행복 하시다고 하시지
않았었나요?"
"네. 지금은 행복 할겁니다........ 우린 그렇게 믿고 있죠."
"멀리 계신가요?"
"네.. 멀리 있죠. 하늘에..... 누나는 어느 날 아파트에서 투신했습
니다. 연락을 받고 가보았을 때. 누나의 몸은 투신으로 인한 상처 외에
많은 타박상으로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누나는 죽음이 아닌 삶을 택
했습니다. 아마 살기 위해 그랬을 겁니다."
"........"
"하지만, 세희씨. 남겨진 자에겐 누나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큽니다.
부모님이 받은 상처는 이루 말 할 수 없거니와. 조카들.. 엄마를 잃은
조카는 외가까지 잃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힘들고 불행한 삶을
살았죠. 지금까지도....."
"....."
"세희씨! 전 누나가 너무나도 외로웠을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누나에게 진정한 말동무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누나는 죽음을 택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세희씨 또한 많이 힘들고 외로울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전 세희씨가 제 누님과 같은 아픈 선택을
하는 일이 절대로 없길 바랍니다. 아이들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
고 싶습니다."
"....."
"제가 세희씨와 아이들에게 친구가 되드리겠습니다."

세희의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소리 없이 주르륵 흘렀다. 세희의
안 보이는 마음까지 읽고 있는 승빈에게 감사함이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아니요. 천만에요. 이제는 주저하지 마시고,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
하십시오. 그러실 수 있죠?"
"네. 그럴께요. 고맙습니다."

승빈이 내민 세끼 손가락에 세희가 자신의 세끼 손가락을 걸고 약
속을 다짐해 본다.

"이제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는 그만 하세요. 아셨죠?"
"후후.... 저 갑자기 큰 부자가 된 것 같아요."
"제가 그렀습니다."
"언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희 어머님을 소개 시켜 드리고 싶군요.
세희씨를 당신이 잃은 딸처럼 아껴주실텐데. 세희씨 또한 친정 부모님
께 차마 말씀 드리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도 털어 내고 말입
니다."
"멀리 계신가요?"
"아니요. 가평에 전원주택 처럼 농가를 개조한 아담한 집에서 두분
이 심심풀이로 농작물이랑 화초를 가꾸시면서 지내고 계세요."
"좋으시겠네요."
"네. 두분 건강에도 좋고, 한번쯤 자식 손자들이 모여도 그렇고 좋
은거 같아요."
"언제 기회가 주어지면.... 그곳에 가보고 싶네요."

승빈은 세희를 집 앞에 내려주며 늦은 시간이 염려스러웠다.

"너무 늦었네요. 아이들 괜찮을까요?"
"네. 괜찮아요."
"그럼 세희씨. 힘 내세요. 아까 한 약속 잊지 마시고요."
"네. 고맙습니다."
"또 고마워요? 후후.."
"후후..."
"밝고, 신나는 음악을 들으시고, 친구들과 자주 만나시고, 만나지
못하면 전화로, 거 왜 여자들 장기 있죠? 수다! 하하. 그렇게 밝게 지
내세요."
"네. 그럴께요. 너무 늦어 피곤하시겠어요."
"제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세요."

승빈은 마음이 가벼웠다.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 도움을 줄 수 있
게 되어 기뻤지만. 한편 그녀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없이
편안하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