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일곱].....전화
담배를 빼어 물었다. 자신의 전화로 인하여 지금 승빈이 걱
정하고 있는 일이 그녀에게 생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이 앞섰다. 너무 생각이 짧았다는 자책을 해보지만.. 후회가 너
무 늦었다.
도시락으로 행복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안한 마음
과 걱정에 승빈이 혼란스러웠다. 경솔한 행동을 무마 할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병원에 가만있
을 수는 없었다.
주소를 확인하고 그렇게 처음 그녀의 아파트를 향했다. 거실
에 불이 켜져 있다. 너무 높아 제대로 집안의 분위기를 파
악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승빈이 분위기를 알 수 있도록
큰소리와 살림살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길 원하는 것은 결코 아
니였다.
그저 좀 전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는 것이 승빈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착잡했다.. 어느덧 11시가 되가고 있다. 아파트 경비원이 랜
턴을 들고 주차장의 차량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천천히 주차
장을 빠져나오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잃었다.
"어서오세요."
"원장님! 어쩐 일이세요?"
"응. 그냥 한잔 생각이 나서."
민수경이 승빈의 얼굴을 살피며 조용한 방으로 안내를 한다.
"미쓰민. 술이랑 안주는 적당히 알아서 가져와."
"네."
민수경이 주문을 하는지 잠시 나갔다 들어오고, 잠시후 술
과 과일 안주가 따라 들어 왔다. 민수경이 승빈의 얼굴을 살피
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원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아니.. 그냥."
"걱정 있어 보여요."
"후후. 그런가? 실은 누군가에게 내가 실수를 좀 했어. 그
사람이 곤란해 졌을 거야."
"원장님 같은 분이 무슨 실수를 하셨길레.."
"응.. 큰 실수를 했어."
그녀의 안부가 궁금했다. 승빈의 전화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
은 없었는지. 아무튼 그날의 갑작스런 전화를 사과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는 그날의 전화가 승빈이 건 전화라는
것을 모르겠지만, 승빈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다시 전화
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낯시간에는 물론 남편이 없겠지
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
다.
깊어가는 가을 오후의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전화기
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망설이던 승빈이 길게 이산화탄소를 뱉
어 내며 전화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그녀다.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이다.
"저.. 병원의 김승빈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전화 드려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네. 괜찮아요. 그런데....무슨 일로?"
"별일 없으시죠?"
"네."
"그리고, 지난번 도시락 정말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별말씀을요. 솜씨가 없어서...."
"아닙니다. 정말로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원비 정산은 되었나요?"
"네. 도시락으로 정산되었습니다."
"후후.."
"하하.."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승빈은 [그날의 전화로 인해 염
려했던 일은 없었었나 보다..] 라는 안심을 했다.
세희는 내려놓은 수화기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따뜻함이
전해져 온다. 거실 깊숙히 파고드는 햇살 한자락에 기대어 봄
날의 따뜻함에 젖어 본다. 어느날 밤 아무 말 없이 뚝 끊긴 전
화로 공포를 느끼는가 하면, 이렇게 따뜻함을 느끼는 전화도 있
구나 하는 생각에 새로운 세계를 접한 기분마저 든다.
세희가 오래간만에 아니, 잊고 살았던 평화로움을 누리는 시
간을 깨우는 울림이 있었다.
"여보세요."
"나야."
"네."
"어디 안나갔지?"
"네."
"정훈이는?"
"자요."
"그래 알았어. 끊어."
좀 전의 평화가 사치였다. 세희는 거실 바닥에 주저 앉아 모
노륨 이음새에 시선을 주었다. 작은 개미 한 마리가 어디서 온
것일까? 길을 찾아 헤메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개미는 멀리 벗
어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 듯이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자
신을 일순간에 죽일수도 있는 세희의 손가락 하나가 머리 위에
있는것도 모르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개미를 누르려고 향하던 검지 손가락
을 멈추었다. 그리고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 개미의 움직임을
따라 그렇게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세희는 자신이 개미의 모
습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평화로운 삶에서 이탈해 버둥거
리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어느
순간 죽음을 만날 때까지 그렇게 제자리를 맴돌며 불안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좀 전 그렇게 따사롭던 햇살마저 온기가 없다. 유리창을 투과
해 거실에 뿌려져 있는 햇살은 여전한데... 춥다...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