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여섯].....그녀 강세희
"어떤 놈이야?"
식탁을 차리던 세희가 주방에서 남편의 한 마디에 벌써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세희는 저녁 8시가 두려웠다. 8시경이면 어김없이 남
편이 퇴근해서 돌아와 벨을 울린다.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기 전에
언제나 심호흡을 한번하고 [오늘은 제발...] 이라는 기원을 하게된다.
오늘 현관문을 들어서는 남편의 얼굴은 나쁘지 않았었다. 옷을 갈
아입고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다 전화를 받은 것이다.
"네?"
"누군데 내가 전화를 받자 그냥 끊어버리는군. 누구라고 생각해?"
"내가 어떻게 알어요?"
"글세...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까?"
"잘못 걸려온 전화인가 보죠."
"잘못 걸었어도 누구네 집이냐고 물어보고 잘못 걸었는지 확인하고
끊지. 당신 같으면 잘못 걸었다고 그냥 놀래서 끊나? 당신 나를 바보
로 알어?"
세희가 식탁 차리는 일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정민이 마저 아빠의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정훈이
를 데리고 슬금슬금 자기 방으로 피하고 있었다. 세희는 그런 정민이
와 정훈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반적인 가정이라면 저녁
시간,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에게 메달려 어리광도 부리고 딸이 가진
특유의 애교도 부리며 웃음이 가득할 나이인데.. 공포감에 자기 방에
숨어야 하는 정민이 정훈이에게 한없이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
다.
"오늘 아침 나 출근한 후로 모 했지?."
세희가 느끼는 두려움과는 달리 남편은 면봉으로 전화기 버튼 사이
에 끼여 있는 먼지들을 닦아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묻고 있었
다.
"정민이 유치원 보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다림질하고, 11시경에
10층 아줌마가 놀러 와서 이야기하다 12시 30분 경에 함께 점심 먹었
어요. 2시경에 정훈이 낮잠 잘 때 슈퍼에 다녀왔어요. 영수증은 냉장
고에 붙어 있고요. 7시경에 쓰레기 버리러 나갔었어요."
순간적으로 세희는 좀 전 병원에 갔었던 일을 쓰레기 버리는 일로
바꿔 말하고 있었다.
"슈퍼 다녀오는데 얼마나 걸렸어?"
"30분 정도 걸렸을 거예요. 정민이가 김밥 해달라고 해서 다녀왔어
요."
세희는 자신의 목소리가 거짓말로 인해, 행여 떨림으로 나오고 있
지 않나 걱정이 되었다. 미세한 먼지들을 닦아낸 면봉들을 한꺼번에
부러트리며 남편이 낮은 톤으로 지시하고 있었다.
"앞으로 내가 있을 때는 당신 전화 받지 마. 내가 받을 테니."
"당신 화장실에 있거나 잘때는요?"
"당분간 자동응답기 누르고 받지 마. 알았어?"
"네."
"밥 차려."
세희가 떨고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아니 오늘 그냥 말없이 끊긴
전화가 어느 정도 기억에서 멀어질 때까지. 아니면 다른 무슨 계기가
주어 질 때까지 두려움을 지녀야 할 것이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났고. 세희는 주방에 촛불을 켰다. 남편이 주방
의 팬 소리가 시끄럽다고 싫어하기 때문에. 식사를 준비 할 때면 냄
새를 없애기 위해 주방 창틀에 촛불을 켜기 시작했다.
유리창 너머와 세희의 가슴에 스산한 가을 바람이 이는데.. 촛불은
흔들림이 없다. 세희는 한기를 느꼈다. 추웠다. 삶이 추웠다.
애들에게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불쌍한 아이들. 7살 정민이가 그래
도 누나라고 동생인 정훈이를 보호하듯이 데리고 들어가더니만, 무서
웠는지 커다란 눈에 맑은 눈물이 고여있었다. 정민이가 엄마를 보자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쳐냈다. 세희가 정성스레 눈물을 닦아주며
[엄마 괜찮어..]라고 눈빛을 보냈다.
"정민아. 사랑해.."
"엄마. 사랑해."
"그래..."
"정훈아.. 사랑한다."
두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정민이와 정훈이는 세희의 생명줄이였다.
"정민아 밥 먹게 웃는 얼굴로 나와.. 알았지?"
"응."
"그래. 착하다."
조금씩 일찍 찾아오는 가을 날 어둠이 하늘에 별들을 하나씩 만들
어 내고 있는 저녁이다. 세상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이는데 과일을
먹으며 TV 코미디 프로를 보는 정민이 정훈이의 웃음 소리만 간간
히 들릴 뿐, 남편은 뉴스를 보듯이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런 남편 옆
에서 세희의 마음은 살어름판 위를 겄고 있었다.
세희의 삶이 어두워진 건 결혼 후 한달 되었을 무렵이었다. 남편과
는 중매로 결혼했다.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 집들이를 하며 말수가
별로 없던 세희가 종일 새신부의 미소로 쑥스러움을 감추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함께 배웅하고 들어와 현관문을 잠그더니 남
편이 다짜고짜 세희의 따귀를 때렸다. 갑작스런 행동과 힘에 세희가
넘어졌고,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다시는 쓸데없이 눈웃음 치며 천박하게 굴지 않도록 해."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갑고 낮은 목소리였다. 처음엔 술기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처음이 7년을 살면서 점점 심해지며 세희를 목
각인형으로 만들고 있었다.
부러지고 까지고 긁혀 상처가 늘어나는 무감각한 목각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