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세엣].....아픔
아내 명은이 집에 없는 날은 의레히 승빈의 귀가가 늦어 졌었다.
그녀가 승빈의 가슴에 확실히 자리 잡은 날도 병원에 남아 학회 논
문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0시가 넘은 시간에 병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장실
불빛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곧 돌아가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도와주세요..]하는 힘없는 목소리와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었다.
승빈이 병원 문을 열었을 때, 밖에 비가 오는지 봄비에 젖은 그녀
가 주저앉아 있었다. 초점을 잃은 시선으로 승빈을 올려다보더니 [도
와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어 버렸다. 승빈이 거절하거
나 망설일 틈도 주지 않았다. 환자를 안으로 옮겨 상태를 보니 온 몸
이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까지 맞고 온 적은 없었었다.
승빈은 응급 조치를 하며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화가 났다. 무
슨 죽을죄를 지었길레 사람을 더군다나 여리디 여리게 생긴 이 여자
를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패서 이 꼴을 만드는지 의사가 아닌 남자
로서, 사람으로써 화가 났었다. 그리고 이 꼴이 되도록 맞고만 있었던
그녀에게도 화가 났다. 왜 더 일찍 피하거나 도망가지 못했냐고 따지
고 싶었다. 여자는 살고자 하는 무의식에 무조건 병원을 향했던 것
같다. 얼굴을 빼고는 온 몸이 무엇에 맞은 건지 멍들어 있었고, 부어
오르고 있었다.
승빈은 인간적으로 안쓰러웠다.
자정이 다 될 무렵 그녀가 의식을 찾았었다.
"으......음...."
"괜찮으세요? 정신이 좀 드세요?"
"네. 여기가...어디죠?"
"생각 안 나세요? 병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여기에?"
"환자 분이 직접 오셨는데.. 기억 안 나세요?"
"그랬군요. 병원 문을 닫았었을 텐데.."
"네. 제가 마침 야근을 하고 있었으니 다행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주사를 다 맞으시고,
안정을 취한 후에 돌아가시죠.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요. 선생님 퇴근하셔야죠."
"전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하구요."
힘없이 대답하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크
리넥스를 두장 뽑아 건네며 일어섰다.
"전 원장실에 있겠습니다. 혹시 모 필요 하신 게 있으시면 부르세
요.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시고요."
원장실로 돌아와 담배를 피워 물었지만 착잡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
다. 환자를 저 지경까지 만든 사람이 남편이라고 단정 짖고, 어떻게
생긴 놈인지 당장에 쫓아가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
었다. 그리고 절대로 누이처럼 허무하게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
각을했다.
새벽 1시가 넘어 그녀의 입원실을 들여다보았다. 잠이든 얼굴에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많이 놀랬는지 자면서도 몸이 움찔움찔 놀라
고 있었다. 승빈이 안쓰러움에 가만히 손을 잡아 주었다. 닝겔은 이제
1/3 정도가 남아 있었다. 조용히 돌아서 나오려는데 그녀가 불러 세
웠다.
"저...."
"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깨셨나 보네요."
"아니에요. 물 좀... 주시겠어요?"
"아! 네 그러죠..."
물을 가져온 승빈이 그녀를 부축했다. 가냘픈 몸이었다. 한 손으로
안아서 어깨를 잡아 주고 한 손으로 컵을 들어주었다. 세희는 의사
선생님의 손이 따뜻하다고 느꼈었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좀 더 주무세요."
"저.. 선생님.."
"네?"
"괜찮으시면 옆에 있어 주실레요? 불안하고 무서워서요."
"아.. 네.. 그럼 제가 읽던 책을 가져오죠."
원장실로 건너온 승빈은 무슨 책을 들고 들어가야 하는지 허둥댔
다. 어차피 책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학회지를 집어들고
그녀에게 건너갔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커텐 사이로 짙어
지는 어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녀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고 승
빈은 들어 주어야 했다.
"선생님."
"네?"
"애들이 둘 있어요. 7살 정민이와 5살 정훈이죠. 그 애들이 없었다
면 전 벌써 죽음을 택했을 거예요."
"어떠한 경우든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혼은 불가능해요. 죽음만이 벗어 날수 있는 유일한 길이죠."
"이혼을 안 해주나요?"
"제가 못해요."
"왜 그렇죠?"
"제가 가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친정 식구들에게 까지 해가 미칠거예
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에요."
"그래도 친정에 의논해 보시죠?"
"부질없는 짓이에요."
"환자분이 제 누이를 닮으셨어요..."
"저를 닮은 분이라.......... 그 누님은 행복하시겠죠?
"글쎄요.... 아마 행복할겁니다."
"저도 행복을 알고 싶어요."
그녀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닦을 생각도 안하고 있
는 듯 했다. 승빈이 휴지로 눈가를 닦아주었다.
어떠한 계기라도 주어진다면 그녀는 쉽게 생을 포기 할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한없는 동점심이 쏠렸다. 지친 그녀의 몸과 의식이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새벽이 오고 있었다. 6시경 병원문을 나서는
그녀에게 승빈은 무슨 말이든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언제든지 힘들면 찾아오세요. 전화를 하시던가..."
명함에 핸드폰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주고 그녀를 보낸 승빈이 전화
기를 들었다.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별일 없으시고요?"
"이렇게 일찍 왠일이니? 무슨 일 있는거니?"
"아니예요. 그냥 안부전화 드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