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만남
의레히 그렇듯이 십일월을 보내며 겨울로 가는 계절 변화에 유행성
감기로 환자들이 늘고 있었다. 진료 시간 전부터 밀려와 줄을 서
있는 환자들에 치여서 피곤함에 뻐근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바라본
벽시계가 4시를 넘어 가고 있었다. 점심식사 후 김간호사가 갖다 준
식은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만성이 되어버린 의식 같은 진료
를 하는 승빈의 정신을 깨우는 차트가 있었다.
그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38개월 된 작은애 차트이다.
그렇찮아도 안부가 궁금하던 차였는데, 그녀가 분명 보호자로 함께
왔을 것이다. 이번엔 얼마 만인가? 근 한달만인거 같다. 그녀의 안
녕과 행복을 기원하면서도 그녀를 보고싶어 하는 마음에 그녀와 그녀
가족이 아파야만 볼 수 있는 현실에 이율배반적인 기원을 얼마나 했
던가. 그녀가 왔다.
승빈의 손바닥에 땀이 촉촉히 젖어 들고 있다.
"다음 환자."
"윤정훈!"
"네~"
"들어가세요."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는 다른 환자들이 벌컥벌컥 밀고 들어오는 문
을 두번 노크한다. [똑똑!] 더욱더 승빈을 긴장하게 하는 울림이 지
나고 정훈이와 그녀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 발음이 정확치 않은 정
훈이의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로 인한 그녀의 엷은 미소와 목례.
"앉으세요. 안녕하셨어요?"
"네.. 안녕하셨어요?"
"네. 덕분 에요. 그런데 정훈이 어디가 아픈가요?"
"지난밤부터 기침과 콧물이 좀 있어요. 열은 없고요."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조용히 진료를 받고 돌아가곤 했었으며, 그
녀를 닮았는지 아이들도 여느 아이들 처럼 소란스럽게 울지 않고 차
분하게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곤 했었다. 정훈이를 진료하며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그녀를 살짝 훔쳐보았다. 다행이 승빈이 걱정하는
일은 없는 듯 했다. 그저 언제나 그렇듯이 보일 듯 말 듯한 화장에
투명한 얼굴 이였다.
정훈이의 유행성 감기는 이제 시작이고 한 열흘 갈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모레 다시 올 것이다. 정훈이와 그녀가 다녀가고 번호표에 따
라 밀물처럼 다녀간 환자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하루를 마감했다. 간
호사들이 퇴근준비를 하고 있다.
"원장님 퇴근 안 하세요?"
"아, 나 일이 있으니 먼저 퇴근들 하세요."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내일 봅시다."
민간호사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남기며 퇴근한 후, 승빈은 뒤늦게
달려와 진료를 요구하는 환자를 어렵게 거부하는 일이 없도록 병원
문을 잠갔다. 원장실 의자에 몸을 묻고, 창쪽에 시선을 두었다. 어느
시인의 싯구에서 읽은 뒤로부터 새로운 느낌으로 바라보게 되는 플라
타너스 아니, 은사시나무가 가을을 온몸으로 전하고 있었다. 크고 작
은 잎들이 탈색되어 낙엽을 꿈꾸고 있었다.
승빈은 낮에 다녀간 그녀를 떠올렸다. 투명하다 못해 창백한 얼굴
에 언제나 보일 듯 말 듯한 슬픈 미소를 보이는 그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작년 가을 지금의 위치에 병원을 이전하기 위해 인테리어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개원이 얼마 남지 않아 마무리 단계에 있을
때였다. 인테리어 업자와 병원건물 입구로 막 들어가려 하는데 조용
한 목소리로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저......언제 개원하나요?"
"추석 지나고 9월 22일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처음본 그녀는 서른 아홉의 남자가 보기에 너무나 맑았다. 그러나
의사라는 직업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그녀는 병색이 있는 듯하게 창
백했다. 그러나 곧 돌아서면서 잊었고, 아니 잊은 줄 알았었다. 나중
에 안 일이지만 승빈에게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여자였다. 여자는 유
난히 하얀 피부에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 이였다.
그리고 지금 불혹의 나이에 텅 빈 병원에서 창밖에 깊어 가는 가
을만큼, 너무 깊어 헤어나지 못하는 아릿한 연정으로 가슴을 따뜻이
데워가게 만드는 여자였다.
낮에 정훈이와 함께 잠깐 보았던 마음 때문인가? 오늘따라 더 그
녀가 떠오른다.
따르릉......
"여보세요?"
"네.. 김승빈입니다. 전화 받으시기 지금 괜찮으신가요?"
"네.."
"오늘 반가웠습니다."
"네."
"그리고 환자가 세희씨가 아니고 정훈이여서 안심했습니다. 정훈이
그리 심하지 않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하시는 거 아시죠?"
"네."
"그래요~ 그럼 좋은 저녁 되시고요. 안녕히계세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계세요."
퇴근길 승빈의 차는 그녀의 아파트 주차장을 향했다. 그리고 베란
다를 통해 스치는 그녀의 희미한 그림자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1107호를 한동안 주시해 본다. 주차장에 눈에 익은 번호의 차
가 들어오면 한시간 정도 1107호의 변화를 감지해보다가 어둠이 깊어
진 주차장에서 차를 돌려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