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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BY 상실 2000-10-24

선산 입구에 쳐놓은 철망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입구에

서는 어머니 산소가 보이지 않았다. P선배가 산중턱에 있는 허름

한 집으로 들어갔는데 보아하니 무당 집인 듯 했다. 집에서 뛰쳐

나오다 시피 한 선배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었다.

-지금 병원에 있다는데?

우리는 무당 남편이 알려준 근처 병원으로 급하게 차를 몰았다.

-오늘 새벽에 여자가 우는 소리가 나서 나갔더니 거의 몸이 얼어

있었데. 집으로 가서 몸 좀 녹이라는데 막무가내로 그냥 내려 가

더란다. 걱정이 돼서 따라갔더니 얼마 못 내려가서 그냥 쓰러지

더라는 거야. 지금 저 집 여자가 옆에 있다고 하더라구.

병원 응급실에 누워있는 L은 정신이 돌아온 듯 했다. 링거를 맞

고 있는 그녀 옆에 무당인 듯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아이고, 보호자가 오셨구만. 그럼 난 이만 돌아가네. 몸조리 잘

하고. 미워할 것 있으면 차라리 미워하고 그리 살게. 가심에 울

화가 꽉 차서 숨이나 제대로 쉬면서 살겠나. 그리 살다가는 죽

네. 자네 인생이 이리 살아서는 안 되는 인생이야.

우리는 그녀에게 응급치료비와 사례비를 보태 주었으나 그녀는

응급치료비만 받고는 돌아갔다.

L은 우리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말할 기운조차 없는

듯 보였다. 눈 밑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머리에는 흙과 지푸라기들이 엉겨있었고 손등은 터서 갈

라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다가 흠칫 놀랐다. 양쪽 손목

모두에 오래되어 보이는 꿰맨 자국이 있었다. 너무 길게 난 상처

였다. 이제야 이걸 보게 되다니...난 L을 본 후 처음으로 눈물

을 흘렸다. 그녀의 모습보다 그녀 마음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더 속상하고 슬픈 일이었다. 그녀의 마음만 알 수 있다면...그녀

가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다 털어 놓을 수만 있다면...아

니...자신이 어떤 마음인 지 스스로 깨닫기라도 한다면 이렇게

암담하지는 않을 텐데...


집에 돌아온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쓰러져 잠이 들

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집안을 진동하는 찌개냄새에 어렴풋

이 잠에서 깨었다. 소파에는 선배가 누워있었고 바닥에는 남편

이 누워있었다. 부엌에서 달그닥 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L은 비장해 보이는 뒷모습을 내게 보이며 무언가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서 스스로 일을 찾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밥을 짓

고 있다니...그녀에게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본 것은 내 착각일

까? 어쨋거나 상관없었다. 그녀가 우리 집에 와서 스스로 한 일

이라고는 해성원에 간 것 뿐이었다. 난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봐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한 참 후 거실에 있는 사람들을 깨우

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기운이 없었지

만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미성이었다.

놀랜 마음이 아직 진정되지 않은 두 남자는 식탁에 앉아 그녀가

날라오는 반찬 등등을 휘둥그래진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띄우며 나와 마주 앉았다.

-모두들에게 너무 고마운데...내가 해줄게 없어서...

-몸은 괜찮은 거야?

-응...주사 맞고 한 숨 잤더니 괜찮네...어서 드세요. 입맛에 맞

을 실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밥맛도 모른 채 한 그릇을 뚝닥 해치웠다. 선배와 남편

은 예의라도 차리 듯 한 그릇씩을 더 먹었는데 L은 그 모습이 너

무나 좋았는지 손수 일어나 밥을 떠다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둘러앉았다. 혹시나 L이 우리에게 무슨 말

을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어제는...정말 미안했어요. 가려고 간 게 아니었는데...그냥

이 집에 들어오기도 너무 미안하고...갈 데를 생각해보니 거기

밖에 없어서...사실 어제 밤에 나 아주 나쁜 생각을 했거든요.

생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난 요즘 내가 무슨 생각

을 갖고 있는 지도 모르겠고...이젠 사는 게 너무 무서워서...내

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거 같고...거리에 서있어도 갈 곳

도 없고...그런데 문득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어요. 그 수많은 아

이들이 나에게 우리랑 함께 살아요 하면서 웃는 모습이...그리고

는 아주 많이 울었어요...아마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울었던 적

은 없었을 거에요. 그 소리에 사람들이 달려와서 살았지만요...

후후...얼마 전에 어떤 스님이 쓴 책이 생각나데요. 아무리 수행

을 한들 그리 쉽게 욕망을 끊을 수가 있고 번뇌를 끊을 수 있겠

나, 하지만 질적으로는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더군요. 베푸는 걸

로...나에게 잘못 한 이들에게 불쌍한 마음을 갖는 걸로...나 솔

직히 지금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이런 처지에서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기

로 했어요. 나도 참 불쌍하지만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그

업도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 때문에 모두들 너무

고생 많았어요. 그 고마움을 생각해서라도 잘 살아야죠.

그리고 미국은 가지 않을래요. 나 여기서도 버틸 수 있을 거에

요. 한동안 절 찾아오지 말았으면 해요. 그냥 그곳에서 아이들이

랑 지낼 거에요. 시간이 좀 흐르고 나도 내 자리가 생기면 그 때

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어질 것 같애요.

L이 말하는 동안 우리 모두는 넋이 나간 듯 앉아 있었다. 그녀

가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것도 처음일 뿐 더러 저렇게 편안해 졌

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설마 우리를 안심시키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마 말은 하지 않았어도 모두가 같은 생

각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우리는 그녀의 옷가지와 물건들을 대충 챙겨서 해성원으

로 떠났다. 그녀는 혼자 가겠다고 우리를 극구 말렸으나 일단 그

곳에 들어가는 그녀를 봐야 안심이었다. 우리는 또다시 원장을

만나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연락을 주십사 부탁을 하고는 불안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선배도 나도 한참동안 그녀를 찾

지 않았다. 전화로만 원장을 통해 그녀의 안부를 전해 들었는데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게 잘 지낸 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각자 일상으

로 돌아왔다.


다시 겨울이 돌아왔다. 올 겨울은 작년에 비해 추위가 일찍 시작

되었다. 남편과 나는 그동안 입양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남편도 나도 네 다섯 살 짜리 여자아이를 원했고 해성원에서 입

양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겨울은 남편과 내가 그나마 집에서 보

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아이와 친해질 수 있는 계절이었다.

남편이 학생들 성적 처리를 마치는 날 우리는 해성원으로 향했

다. L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면 아이에게 미안할 일일

까? 하지만 나에게 입양을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준 것도 그

녀였고, 남을 돕는 다는 것이 단순히 자기 만족이 아닌 삶의 의

무라는 것도 가르쳐 준 그녀였다. 그녀는 가는 날도 나에게 연

방 고맙다는 말을 했지만 사실 고마운 것은 나였다. 그녀가 돌아

간 후 남편과의 사이도 돈독해 졌으며 학생들을 대하는 내 태도

도 많이 부드러워 졌다. 아직도 그녀의 에너지는 남아 있었던 것

일까...그녀의 에너지는 아직도 저 곳에 있는 아이들이 끊임없

이 퍼가고 있을까...


내 기대를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너무나 변한 모습으로 우리

에게 나타났다. 그녀가 움직이는 곳이 어디든 아이들은 병아리

새끼 마냥 그녀 뒤를 졸졸 따랐고, 모든 아이들에게서 그녀의 에

너지가 느껴지는 듯 했다. 겨울 속에 있는 해성원을 봄으로 착각

하게 만드는 것은 이제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스스로

봄이었고 그녀가 봄의 대지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양분

을 어린 새싹들에게 끊임없이 공급해주면서도 마르지 않는 대지

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새싹 중 하나를 담아왔다. 그리

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새싹이 우리 겨울을 곧 봄으로 바꿔

주리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