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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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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BY 상실 2000-10-22

남편과 나는 한동안 L의 문제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녀의 어

머니에게 모든 것을 말하려던 결심은 너무나 쇠약해진 그분을 보

자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 L은 소송이 진행되자 우리 집으

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가끔 그녀

의 멍한 눈동자가 나를 걱정시켰지만 아마도 두고 나온 아이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다. 소송이 진

행되고 법원을 오가던 중 그녀에게는 또 한번 커다란 시련이 닥

쳤다. 시어머니가 사돈집에 가서 난동을 부려 어머니가 의식을

잃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머니는 중환자 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나 가망이 없다는 말뿐이었다. L이 면회를 갈 때는 늘 내가

동행을 했다. 언제 남편이 나타나 난동을 부릴 지 모르는 상황이

었다. 생각보다 남편을 두려워 하는 그녀의 증세는 심각했고 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내게 보이지 안으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

으나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했다. 면회를 다녀오는 날이면 가뜩

이나 없던 식욕인지라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몇

주 후 어머니는 세상을 버리셨다. 가시는 날 어머니는 잠시 의식

이 돌아와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마지막까지 당신 딸을 부탁한다며 연신 눈물을 흘리셨

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몇 번이나 실신을 한 L은 눈에 띄게 쇠약해

졌는데 아버님이 보시고는 나에게 부탁을 하셨다.

-아무래도 저것이 제정신이 아닌가보다. 장례식 끝나고 니가 정

신치료라도 받도록 도와주겠니? 내가 너에게 빚이 너무 많구

나...딸년이라 내가 어쩌지도 못하고...지 에미가 있어야 어떻

게든 할텐데...아무래도 나보다는 너를 더 편하게 생각하지 않겠

냐...고모들이라고 있어봤자 다들 멀리 살아서...그리고 저 녀

석 좀 안정되면 아무래도 미국에 사는 지 이모한테 잠시 보내는

게 어떨까 싶구나.

통장을 하나 건네 받았다. 꽤 많은 돈이 들어있었는데 이혼 소송

을 준비할 때도 착수금이며 그녀의 생활비라고 건네 받은 돈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L과 정신치료를 받으

러 갔으나 L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병원에 가는 것도 그

냥 나를 위해 다녀주는 눈치였다. 그녀는 그런 것 하나 자신 뜻

대로 하지 않으려 했다. 내게 미안해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소송은 생각보다 쉽게 진행되었다. 워낙 사유가 분명했고 L이 위

자료와 아이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게

다가 그녀의 아버지도 그간 사위에게 들어간 투자액도 모두 포기

하겠다고 하자 오히려 시어머니라는 작자가 나서서 빨리 마무리

를 지으려는 기색이었다. 일이 쉽게 풀리자 남편과 나는 L의 거

처에 대해 고민했다. 그녀는 아무 것도 스스로 고민하지 못했

다. 마치 사육 당하던 야생동물이 다시 야생으로 돌아갔을 때 한

동안 모든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후 향방에 대

해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잠시 외국이라도 나가있다 올래?

-......

-애들 아빠가 언제 괴롭히러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일단 잠시

나가있으면서 이것저것 다시 시작할 거를 생각해보는 건 어떠니?

-......

이혼수속이 모두 끝나자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

가 실어증이라도 걸린 것은 아닌가 덜컥 겁이 났으나 기우였다.

-나 해성원에 갈래

-뭐?

-내일 가는 날이잖아.

-......

-여기서 갈려면 어떻게 가야지?

그녀의 일상 중 한가지는 잃지 않았구나 싶었다. 남편도 찬성하

는 눈치였다. 아마 지금 그 일이 그녀에게 다소나마 안정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도 찬성이었다.

차로 그녀를 데려다 주고 오면서 남편과 나는 원장을 잠시 만났

다. 대강 그녀의 심신이 많이 약해졌으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

기면 곧바로 연락을 해달라고 연락처를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삼일간 밀린 집안 일을 하느라 나 역시 많이 지쳤다.

-당신 고생 많았다.

퇴근길에 영양제를 두 통이나 사왔다.

-이게 다 모야? 웬 거야?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두 사람 다 그렇게 지쳐서...게다가 L

은 밥도 잘 안 먹고 어떻게 버틸 꺼야. 내가 능력만 되면 보약

을 딱 사오려고 했는데 일단 그거라도 먹고 기운들 차려봐.

-당신...정말 고맙다...

-참 빨리도 말한다. 그 동안 왜 그 말 안 해주나 했다.

-아냐...늘 너무 고마웠어...말 안 해도 알잖아. 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나 그 날 아이들보고 생각 많이 했다.

-무슨 생각?

-입양...말야...섣불리 결정하지는 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끝

까지 책임질 수 있는 자신 있으면 당신 생각대로 해...당신 결정

에 따를게...사실 당신 워낙 성격이 깔끔하잖아. 만약 입양한

녀석이 문제라도 일으키면 당신이 그 녀석 끝까지 책임질 수 있

을까 그런 생각 많이 했어...그래서 그 동안 입양 반대한 거

구...워낙 남에게 불필요한 감정 안 갖는 사람이잖아 당신...근

데 이번 일 겪어보고 당신 다시 봤다. 잘 생각해 봐. 그리고 난

비밀입양 반대야...혈액형 맞춰서 갓난 아이들 데려오는 거 싫

어. 당신이 입양아라는 거 당당히 사람들한테 밝힐 자신 없으면

키우는 데 아이도 당신도 다 힘들 꺼야.

-그래...나도 비밀입양은 반대니까...천천히 생각해보지 뭐...일

단 L문제 해결되는 거 보고...

해성원에 L을 데리러 갔다.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이미 나갔다

고 했다. 어떤 남자가 데려갔다고 하는데 P선배인 것 같았다. 선

배의 휴대전화로 연락을 했다. 저녁을 먹인 후 들여보낸다고 했

다. 그러나 그 날 L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L좀 바꿔줄래?

-어제 선배랑 있었잖아요.

-저녁 먹이고 금방 들여보냈어. 안 들어왔니?

선배가 금방 집으로 달려왔다. 나보다 더 안절부절 못하는 선배

때문에 정신만 더 산란했다.

친정 집에 전화를 넣었다. 그곳에도 가지 않았단다. 불길한 생각

이 들었다. 혹시 집 앞에서 끌려간 것은 아닐까? 대전에 전화를

했다. 다행이 아이들이 받았다.

-엄마요? 우리 엄마 집나갔어요. 이제 안 와요.

그 집 사람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아이들 입에서 저런 말

이 나오도록 하다니...

-혹시 아버지 계시니?

-아니요. 회사 가셨어요.

-어제 아버지 들어오셨니?

-아니요. 우리 아빠 바쁘셔서 집에 안 들어오세요.

전 남편에게 끌려갔을 가능성이 많았다. P선배는 자기가 전화를

걸어보겠다고 했다. 문제만 더 커질 것 같아서 남편이 대신 전화

를 넣었다.

수화기 밖으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남편

이 수화기를 귀에서 떼야만 했다. 전화를 끊은 남편의 얼굴이 황

당함으로 뒤 덮혔다.

-무슨 소리 하냐는데? 진짜 모르는 것 같애...

-그럼 어디를 간 거야 얘가...애들 보고 싶어서 내려간 건 아닐

까?

-대전에도 안 왔다며?

-그냥 내려갔다가 멀찍이 얼굴만 보려고 했을 수도 있잖아.

-그럼 다행인데...

그 흔한 휴대전화라도 해주지 않은 내 불찰이었다. 그래도 그렇

지 만약 자신의 의지로 어디를 가려고 했으면 이 곳에 연락이라

도 했을 텐데...

-혹시...어머니 산소에 간 건 아닐까?

P선배의 말에 우리는 허겁지겁 그녀의 선산이 있는 인천으로 내

려갔다. 설마 날도 추운데 그곳에서 밤을 샜을까 하는 생각을 하

면서도 지금 그녀의 정신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생

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초여름이라고는 하지만 밤에는 아직

도 서늘했다. 그 상태에 그곳에서 밤을 샜다면 정말 큰일이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