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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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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BY 상실 2000-10-18

선배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무심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귀

찮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L을 만나 무슨 설득을 해야 하

는 건지, 만약 내 입장이라면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던 친구가 어

느 날 불쑥 찾아와 니 얘기는 모두 들었으니 같이 고민해보자 라

는 둥의 얘기를 건넨다면 어떨지 나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결

국 이런 저런 생각으로 두 달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선배한

테는 이 후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겨울이 마지막 기승을 부릴 무렵,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결혼

전 나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밀었다는 사실도 새삼 떠올랐다. 어

찌되었건 마지막 보루로 나에게 연락을 계속 취한 것이라는 선배

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또 한번 그녀의 도움

을 모른 척 하는 꼴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해성원은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칼

바람은 여전했으나 언 땅을 힘겹게 뚫고 올라오려는 새싹이 여기

저기서 솟아나고 있었다. 해성원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아이들

의 뛰어 노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겨울의 언 땅을 녹이는 것은

어린 생명들이다.

아이들이 뛰노는 마당을 지나 건물로 들어갔다. 암모니아 냄새

와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슨 냄새인가 싶었는데 그 건

물 안에는 다운증후군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아

마도 건물 두 군데에 정상아들과 정신장애아동들을 나누어 보살

피는 듯 했다.

원장실로 들어가려던 나는 세탁실에서 이불빨래를 하고 있는 그

녀를 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놀라는 듯한 표

정을 지었는데 이내 특유의 미소를 보이며 손짓을 했다.


우리는 산 아래로 내려와 허름한 다방으로 들어갔다. 퇴폐적인

느낌이 곳곳에 묻어나는 다방이었다. 커피를 시켰지만 그녀도 나

도 커피 잔을 들지 않았다. 그녀가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너무

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언제부터 피웠냐는 말을 하는 게 이상

할 정도였다.

-고민 많이 했겠네...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형이 널 찾아갔다고 하더라. 아직도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

지...안스러워...

-집착이라고 생각하니?

-그럼 죄책감이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하던 무슨 상관일까...죄

책감이던 책임감이던 집착하는 건 분명한 걸...니 성격에 내 얘

기 듣고 얼마나 고민 많이 했을까 생각했어...니가 찾아오지 않

아서 역시나 했지...남의 생활에 끼어 드는 거 주제넘다고 생각

했을 테니까...

-점쟁이 다 됐구나?

그녀는 잠깐 웃었다. 이제 그녀의 웃음은 더 이상 신선한 그것

이 아니었다. 권태로움이 묻어나는 중년 여자에게나 볼 수 있는

웃음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너 얘기 듣는 다는 거 나로서는 썩 유쾌할

수 없는 일이야. 또 너에게 듣기 전에는 믿고 싶지도 않았고...

형 얘기도 마찬가지야...널 찾아온 건...혹시나 니가 나한테 할

얘기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야...니가 1년 동안

나에게 전화한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녀는 두 번째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반쯤 피울 동안 그녀는

말이 없었는데 나는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내가 한말

을 되새겨 보고 있었다.

-너에게 도움을 받자고 전화한 것은 아니었어...그냥...내가 살

아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은 거였지...아마 니가 들었다는 나에

대한 소문 전부 사실일 꺼야...사실이겠지...선배가 한 말도

모두 사실일 테고...근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제 와서...나

나 그 사람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매듭지어 지겠지...난 그 사람

이랑 못 헤어져...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헤어질

수 없다는 거야...내가 그 사람한테 벗어날 수 있었다면 애초에

결혼을 했을까? 세상에는 벗어날 수 없는 천적이 있다는 거 생각

해본 적 있니? 나한테 그 사람이 그래...만약 그 때...형과 결혼

했다면...벗어날 수도 있었을까?...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

어...그 사람한테 너무 무방비하게 오랜 시간을 옭아매진 걸...

난 꼼짝없이 훈련된 한 마리의 쥐새끼에 불과해...

-적어도 내가 아는 너는

-니가 아는 나?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건 하루하루 그 사람

을 생각하기 싫어서였어...스무 살이 어떤 나이인 줄 아니? 법적

으로만 성인이거야...난 그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그 사람

에게 벗어나 여기저기서 손가락질 받고 살 용기도 없었고, 엄마

한테 도움을 청할 용기도 없었지...하루하루 죽고 싶다는 생각뿐

이었어...그런 날 안다고 할 수 없잖아? 니가 알던 나...아무 것

도 아닌 거야...이십 년을 똑똑하고 예쁘고 착하다는 말만 듣고

자랐지. 난 내가 어떤 삶을 살까 늘 궁금했어. 우리 집은 부자였

고 난 재능도 많다고 생각했거든...하고 싶은 게 있다면 다 이루

는 줄만 알았지...그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랬어...내 인생에 잠

시 스쳐 가는 남자구나...이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다면...

하아...지금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 있을까...

-같이 고민해보자...분명히 방법이 있을 꺼야...

-너 맞고 사는 여자들이 왜 이혼을 못하는 줄 아니? 사랑? 물론

그런 여자도 있겠지...하지만 매를 맞는 다는 거...이미 이성적

인 관계에서 벗어난 거야...사람이 매를 맞으면 처음에는 황당해

서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어. 그러다가 반항을 하지...그 반항

이 먹히면 문제가 없지만 그 반항이 다시 매로 묵살되면...그 여

자는 그 때부터 매가 무서워지는 거야...이유도 없어...그냥 매

라는 것에 노출되면 사고도 없어져...어떻게든 그 자리를 모면

해 볼까...그냥 먹이감이 된 작은 짐승에 불과해...

한숨이 나왔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가...그 때 도망가

버린 선배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녀의 도움을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녀 말대로 이제 와서 이런 후회가

무슨 소용인가...

-제발...벗어나려는 생각을 가져봐...평생을 이렇게 살 수 없잖

아. 일단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안되면 고소라도 해야지...엄

마 걱정하는 거 알지만 엄마도 아실 건 아셔야지. 왜 바보처럼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거야. 니 혼자 그러고 살면 남

들이 다 편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사람들에게 니 삶이 노출되

면 좀 어때. 그것보다 더 한 고통도 참고 살면서. 절대로 늦지

않았어. 내가 도와줄게.

-이젠 내 삶이 노출되는 거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난 그 사람

이 우리 부모님에게 어떤 짓을 할까 그게 무서워...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정상적인 사고도 삶에

대한 애착도 자신에 대한 애정도 모두 소멸된 상태였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다니...난 생전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인간이 어떻게 한 여자를 이런 식으로 밟아 버

릴 수 있는가.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친구를 끝까지 도와야 겠다

는 의지가 타올랐다. 나 역시 이런 나에게 놀라고 있었다. 하지

만 지금 L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