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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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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BY 상실 2000-10-12

망년회가 있은 후 한동안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오랜만의 과음이 아무래도 무리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취한

정신에 눈길을 오래도록 거닐다 결국 몸살이 난 것이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나니 원고가 정신없이 밀려있었다. 밀린 수

업이며 번역 일 때문에 짜증이 심해졌다. 남편과는 사소한 언쟁

이 끊이지 않았고 아이들이 써온 글들도 하나같이 답답한 것 들

뿐이어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P선배의 연락을 받았다. 한 번 만나자는 것인데

이런 정신에 L의 얘기까지 들어야 한다는 것이 좀 부담스러웠

다. 하지만 그 날 밤 선배의 안타까운 행동들을 생각할 때 어쩌

면 나에게 무언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까 싶어 거절할 수 없었

다. 그만큼 그 날 선배의 모습은 애처러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

고, 사람들에게 술을 권하거나 웃어주던 모습도 뭔가 자연스럽

지 못한, 어쩌면 순간적이나마 현실을 잊고자 한 행동처럼 느껴

진 것이다.

의례적인 인사와 안부만 간단히 전하고는 선배는 잠시 담배를 피

웠다. 낮에 보는 선배는 초췌해 보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가

락이 연기와 함께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난 니가 우리를 좀 도와줬으면 해...아니...L을 좀 설득해 줬으

면 한다...

우리라는 말이 날 당황하게 만들었다. 우리라고?

-사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끝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걔가 시어머니 한 테까지 맞고 사는 거 아니? 그 놈

한테야 늘 맞고 살아왔고...물론 이혼이라는 거...너도 결혼해

서 알겠지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거 알아. 하지만 사유가 너무

명백하잖니...시어머니와 남편의 폭력, 남편의 외도...난 도무

지 왜 그렇게 살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두통이 시작됐지만 나 역시 담배를 꺼냈다.

-형, 전 사실 L이 어떻게 결혼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사는

지 제대로 몰라요. 모두 주워들은 얘기뿐이에요. 게다가 전화로

는 늘 행복하다고 하는 애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물론 전후사정을 막론하고 시어머니와 남편한테 맞고 살고 남편

이 외도까지 한다면 분명 이혼사유는 명백하지만 어쨌든 L의 선

택이에요. 이혼은 형 말대로 쉬운 게 아니죠. 그리고 그 애처럼

자신에게 단호한 사람은 남의 충고로 이혼하지 않아요. 자기가

정 못 견디면 하는 거죠. 제가 너무 매정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

지만 전....할 수 없어요.

진심으로 선배에게 미안했다. 지금 그의 절실함이 나에게도 가감

없이 느껴졌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에, 도움

을 주려 해도 받으려 하지 않는 그녀에게 얼마나 절망했을 것이

며, 자신이 아직도 사랑하는 여자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에 하

루하루의 고통이 어느 정도일 것이라는 것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넘을 수 있는 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 넌 예전에도 남의 문제에 개입하는 거 참 싫어했지...섣

부르게 남의 얘기도 안 했었고...내가...그래서 널 찾은 거야...

물론 그 애가 지금 너에게 현실을 숨기고 있어도...어쩌면 마

지막으로 너에게 기대고 싶어서 연락을 계속 하고 있는 건 아닐

까...결혼 전에 널 만났었다고 하더구나...너에게 정말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고 했어...너라면 혹시 어떻게든 해결의 실마리를

주지 않을까 해서...니가 그 남자를 직접 보고 자신에게 한마디

라도 정신차릴 수 있는 말을 해주길 바랬던 거지...그래서 일부

러 그 놈을 너에게 보였는데...니가 너무나 냉정하게 그 자리를

떴고...그래서 L역시 너에게 더 이상 얘기하는 것이 겁이 났을

꺼야. 아마 너도 J가 떠들고 다니는 얘기 들었겠지?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애 수술 받으러 다닐 때......내가 늘 함께 다녔었어.

형 참 잔인한 사람이다...사람들...아니 형 스스로도 형이 바보

같다고 하겠지만...내가 볼 때 형은 너무 잔인해. 이 말이 머리

에서만 맴돌았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난 지금 너무 후회한다...내가 너무 나약해서...그 애를 그런

삶으로 내몬 거야...그래도 그 놈이 나보다는 나은 삶을 살 꺼라

는 막연한 기대로...도망쳐 버린 거지...근데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 제발 부탁이야...혹시 너가 나서주면 그 애

도 힘을 얻지 않겠나 싶어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야...

-......그래요. 한 번 만나는 볼게.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요. 형이 그렇게 설득했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앤데...

내가 모르는 사이 나도 그녀의 불행에 한 몫을 했다는 자책감도

있었다.

선배가 지갑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마지막 주 토요일에 가면 볼 수 있을 꺼야.

종이에는 해성원이라는 곳의 약도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

다.

-그 곳에서 자원봉사를 하거든...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원봉사라니...헛헛한 웃

음이 새어나왔다.

-니가 끼어들 문제가 아닌데 이런 부탁해서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정말 너밖에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어머니께 말씀 드

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어머니도 요즘 많이 아프신가 보더라.

-어머니는 전혀 모르고 계신 거에요?

-그냥 처가 도움 얻고 사는 사위정도로 생각하시는 거 같애. 어

머니 성격에 맞고 산다는데 가만히 놔두시겠니...게다가 외도하

는 거 아시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나서서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란지...

차라리 어머니께 모든 걸 말씀드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