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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BY 상실 2000-10-05

-나 결혼해...

순간 술자리는 정지화면처럼 멈춰버렸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누구랑 하니?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니가 왜?...

생각해보면 그때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이 있었

던 것 같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로 억지로 끼워 맞춘 기억일 수

도 있었고 아니면 당시에는 누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누가 술

잔을 들고 있었고, 누가 삼치를 뜯고 있었고 중요하지 않았기 때

문에 P선배의 행동은 그저 일상처럼,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의 일상처럼 다가왔을 수도 있었다.

-법학과 선배야...

아무도 묻지 않자 L이 말문을 열었다.

하아...결혼이라니...아니 L의 결혼이라니...순간 들었던 감정

은 분명 배신감이었다.

그녀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할 이유도 없었던 나는

내 감정에 스스로 놀랐지만 그것은 분명 배신감이었다.

우리가 늘 궁금해했던 그녀의 미래는 이런 출발이 아니었다. 우

리도 알 수 없는 어떤 신종 전문직에서 입지를 키워가거나 아니

면 아버지의 재산으로 화끈하게 사업을 하리라는 다분히 그 당

시 여대생이라면 꿈꾸는 그런 모습, 어쩌면 그녀로 인해 우리가

대리만족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성장, 그것을 위해서는 절대 이

런 출발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너 그 동안 연애했었니?

J의 질문에 모두 황당한 표정들이었다. 우리가 궁금한 건 연애

를 했었느냐 따위가 아니었다.

-법학과 누구?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

점입가경이다. 제발 그따위 질문은 집어쳐. 화가 치밀었다.

우리가 묻고 싶은 건, 아니 적어도 그녀의 주파수와 어느 정도

닿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니가 왜...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J의 질문에 모두 현실로 돌아온 듯 했다. 멈췄던 술자리

가 다시 술렁거렸다.

-고시 공부하는 선배야. 일 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어.

그녀의 표정 때문이었을까...배신감을 넘어 순간 증오심이 일었

다. 저 행복에 겨워 죽겠다는 표정이라니...물론 그녀가 우리의

기대대로 살 의무는 없었다. 또한 그녀가 우리의 기대를 알리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때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에 겨운 표정은 분명 급조되고 날조된 것이었

다. 그 가증스러운 속임수가 나를 더 미치게 했다.

결국 나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4학년의 겨울이 그렇게 시작되고 L은 졸업 전에 결혼식을 했다.

결혼식 일주일 전에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를 특별히 좋아

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던 것은 다 내 성격 탓이었을 것이다.

서클생활을 하긴 했지만 난 어느 곳에서도 열성적이지 못했다.

지적호기심도 없는 편이었고 사람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었기 때

문이었다.

물론 그녀에 대한 내 관심은 예외였다. 그녀가 유일하게 생각하

는 말벗이 나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일단 남 얘기하는 것도

취미에 맞지 않았고 남 얘기 들으면서 이래라 저래라 충고하는

것도 취미에 맞지 않았다. 서클 선배들이 언니노릇 하려는 것도

같잖았다.

-넌 너무 드라이해.

그녀가 가끔 나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니가 편해.

드라이한 성격 덕에 그녀의 말벗이 된 것이다.

학교 근처 커피숍에서 만난 그녀는 약간 야윈 모습이었다.

-왜 그날 먼저 갔어?

난 대답 대신 담배를 물었다.

-니가 왜 결혼을 하냐?

첫 모금을 마시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이 그래?

한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담배 한 개피를 다 피울 동안 그녀

는 창 밖을, 나는 그녀 얼굴만 바라보았다.

-일 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야.

나한테 그 남자 얘기 해주려고 이 자리에 나오라고 했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나 역시 그 남자가 궁금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세속적인 궁금증이었다.

-P선배가 나 좋아했던 거 알지?

나만 아는 사실이 아니었다. P선배는 좀 소심하고 무능해 보이

던 선배였다. 물론 그 성격에 L에게 화끈하게 대쉬 한 번 못해봤

겠지만 서클 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언젠가 P선배와 술을 같이 마셨던 적이 있었어. 그 때 옆자리

에 그 선배가 있었는데 둘이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하더라구. 그

래서 합석해서 술을 먹었는데...

점점 얘기가 따분해 지기 시작했다. L도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스스로 구차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엉뚱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 그 사람과 살 자신있어.

-뭐?

내가 그 남자에 대해 알고 있어야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