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CHAOS의 아이디를 가진 여자----월요일
나는 빌라 문을 들어설 때면 수위 아저씨는 얼른 모자를 쓰고 반쯤 잠긴 눈으로 나의 뒤를 따라 나왔다.
밤늦게 독서실에서 온 자식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하면서.....
나는 여러 종류의 남자들을 상대 하기 때문에 그들의 눈빛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다.
이 아저씨의 눈빛은 그런 여느 남자들의 눈빛은 분명 아니다.
학교 교장을 했던 그는 정년퇴직 후 우리가 살고 있는 빌라에 수위를 하고 있다.
그의 자식이 교수라는 말도 있고, 의사라는 말도 있다.
그를 보면 나도 가끔씩은 내 직업에도 긍지를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직업의 귀천은 자격지심(自激之心)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를 보면....
오늘도 나는 술에 취해, 가게 문을 닫을 때 까지 죽치고 앉아 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술 취한 손님을 떼버리고 오느라 기진 맥진한 상태다.
수위 아저씨는 학생 가르치던 버릇을 숨기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505호 아가씨.. 술 조금씩 마시고 다녀요... 건강이 최고야 최고!"
"아이 샌님..또 잔소리..."
나는 그의 잔소리가 싫지는 않다. 그는 그러면서, 항상 먼저 달려가 승강기 문을 열어주며5층까지 눌러 주었다.
나는 505호에 살고 있다.
나는 비록 술집은 다니지만, 나 나름대로 철학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고로 인간답게 살아야 하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삶의 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통신상에서 많은 지식을 쌓으려 노력한다.
요즈음 나는 [철학산책]이란 홈페이지에서 알게 된 cosmos란 아이디를 가진 남자와 통신중이다.
나의 아이디 는 chaos 이다.
이전엔 여기저기 많은 동호회에 가입해 다른 사람의 인생도 엿보고, 인생에 대한 의문도 가져 보지만, 매사 긍정적인 나의 성격이 다른 사람과 철학적 교류를 가지는 것이 철학적인 고민보다 지식의 수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때로는 나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며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힐 때도 가끔 있었다.
에레베이터 문이 열리자, 긴 복도에 붙은 많은 호수의 문들이 일제히 열릴 태세를 갖춘 것 같아 두려움이 들었다.
(새벽에 누가 일찍 문을 열겠는가 )생각되지만 웬 지 내 모습을 5층 이웃에게라도 보이고 싶지 않다.
특히 506호 남자에게는 더욱.…
503호 문을 지날 때 그 여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실로 악몽 같은 그날이...
그 일만 생각하면 나는 매우 우울해 진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 같으면 심한 우울증으로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빼빼 마르고 부끄럼이 많다는 기억이 있는 그녀의 남편을, 한번인가.. 본일이 있다. 어쩌면 한번 이상 본지도 모른다.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어느날 지하 슈퍼에서 물건을 사고 보니 돈이 모자랐다. 주섬주섬 돈 만큼 물건을 내려 놓으니 뒤에 선 그 남자가 ,
"저 여기 돈 있습니다."
"어디서 뵌 분이더라"
속으로 (우리 술집에 오는 남자 손님인가..) 생각했다.
"저 503호에 사는 이웃입니다."
그의 몸무게 만큼이나 적은 목소리로 말하며 돈을 내려놓고 달아나듯 가버렸다.
그 후로, 그 남자를 본일이 없고 돈을 갚는다는 것이 잊어 버렸다.
(이제 영원히 그 빚을 갚을 길이 없다…. )
이런 생각 속에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503호 문이 덜컹 열렸다.
무슨 나쁜 짓을 하고 들킨 아이처럼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어 술이 다 깨어 버렸다.
나는 얼른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나의 뒤통수를 향하여 남자가 말했다.
나는 뒤돌아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뒤따라 나오던 그의 부인이 그의 등에 매달린 생수 통 가방 끈을 잡아 당겼다.
두 부부가 새벽에 금정 산 약수터를 가는 중인가 보다...
그들은 얼마 전에 503호 이 집에 이사를 온 사람들이다. 얼마간 비어있던 503호이다.
이전에 이 집 식구들과 나와의 관계를 소문으로 아는지 그 여자의 눈빛이 적대시 하는 모습이 영력 했다.
집에 들어와서 샤워를 했다. 몸을 담그고 물이 철철 넘치도록 그냥 두었다.
복도에서 본 그 여자의 눈빛이 어른거려 계속 우울해 졌다.
누군가 이야기 했던가?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흉악한 사랑이라고…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웃으로 달려간다고…그러나 나는 이웃을 사랑함으로 부질없이 금빛으로 도금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떠한 사건이 벌어지며 또한 피해를 입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확률에 내가 재수없게 붙들린 것이다.
어느날인가 비가 질퍽하게도 내렸다. 그날은 동래 지하철 옆 작은 산에서 붉은 기운이 비칠 무렵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살고 있는 빌라 아래 화단에 경찰이 두 사람이나 있고, 수위 아저씨와 몇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다 수위 아저씨에게 인사나 하려고 가보니 506호 남자가 서 있고 503호 여자가 울고 있는 듯 했다.
(503호 아저씨가 술에 취했나….)
순간 506호 남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인 것이 후회가 되어 돌아서려는 데 수위 아저씨가 경찰을 향해
"이 아가씨가 505호 아가씨입니다."
순간 바닥에 503호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이 죽은 듯 했다. 그만, 자신도 모르게 옆에 남자를 끌어 안았는데 506호 남자이다.
이 남자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뻣뻣한 자세로 있었다.
그때, 울던 그 여자가 안고 있던 그의 남편을 떨어트리며, 벌떡 일어나더니 나의 머리 체를 휘어 잡았다.
"여우 같은 년 온갖 사내 다 꼬시고.."
"아니.. 왜 이러세요?"
"이년 아 ! .내 남편 살려내라"
"….."
"아주머니 왜 이러세요.."
경찰이 놀라 여자를 떼어 놓으려 애썼다.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잖아요?"
"틀림없어요 저 년이.."
얼마나 힘이 센지 내 머리카락이 한 움큼 뜯겨 나간 것 같았다.
경찰이 겨우 말리고 있는데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구급차가 왔고 집차를 탄 남자들이 왔다. 형사인지 검시관들인지..
그 여자는 남편을 안고 흔들며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현장검정 해야 하니까 이러 지 마세요.."
"아가씨 잠깐 봅시다"
"이 남자가 아가씨 집 베란다를 타고 넘어 오다가 떨어져 사고가 났습니다."
"아니 왜요? 도둑이 였나요?"
"아니? 뭐라고 저 년이...."
붉은 그녀의 눈알이 피빛이 되었다.
순간 주위에 빌라의 모든 주민이 다 모인듯한 느낌이 들었다.
군중들이 그렇게 무서워 보이긴 처음이다. 울고 싶어졌다.
그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 경멸하는 눈빛을 보았다.
모두가 오해를 하더라도 그 남자에게만은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나는 이남자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목소리는 내 마음 속에만 메아리 쳤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그날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 *
오늘 새벽 503호 여자의 눈빛이 하루종일 우울해 저녁에 출근을 하지 않았다.
오전 내내 무덥던 날씨가 기어이 내 마음처럼 폭발했다.
마른 하늘에 번쩍거리는 번개가 난리를 치다 마침내 비가 내렸다. 후 두둑거리는 빗소리가 베란다 타일을 두드렸다.
비와 함께 하루종일 폭발할 것 같은 우울이 겨우 진정되었다.
약간의 부설거리는 비가 내리고 금정 산은 더욱 푸른 색 치마를 입었다 . 산허리허리마다 하얀 속치마가 보이는 듯 했다.
오늘은 웬 지 2시쯤 506호 남자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었다.
항상 5시 정각에 들어오는 그가 오늘은 웬일일까..
한참 귀를 기울였으나 몇 시간동안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물론 숨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6시쯤 옆 베란다의 창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가 베란다에 서 있었다. 금정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케블카 선을 바라보는걸 까….)
(그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걸 까?)
506호 남자가 일요일 날 어김없이 성경책을 들고 나가는걸 보면 교회에 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저 남자는 날 분명 경멸할 것이다...)
이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또 불쾌해 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저 사람 때문에 내 행동에 제약을 받아야 하는가? 그 생각이 미치자 베란다 문을 확 열었다.
그리고 베란다로 나갔다. 동시에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안으로 들어와서 이젤 을 차 버렸다. 캠퍼스가 거실 바닥에 떨어졌다.
얼른 집어 들자 아직 덜 마른 유화 물감이 땅바닥에 묻었다.
그의 얼굴에 물감이 묻었다. 눈 아래 묻은 물감이 꼭 우는 듯 하다.
(내가 차서 아픈걸 까....)
506호 남자의 키는 172-3정도다.
내가 어떻게 그의 키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베란다로 나오면 나는 거울로 비쳐 반사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캠퍼스의 비율로 그의 신장이 어느 정도 인지 그의 어깨넓이가 어느 정도 인지 나는 알 수 있다.
나의 취미는 그림 그리기 다.
어릴 쩍부터 타고난 소질인지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기지배가 환쟁이라니 "하면서 나를 미워했다.
그래서 내 꿈을 접어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 꿈을 버릴 수 없었던지 이 집에 이사 오고부터 창문밖에 비치는 금정 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의 유일한 취미는 컴퓨터 통신을 하며 옆집남자를 몰래 훔쳐보며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집에 있을 때 나는 모든 시간을 이 두가지 일로 할애 한다.
그림을 그리며 느낀 사실인데, 어느날, 그 남자에게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 남자는 주위 사람에게 다정다감해 인사도 잘하고 특히 504호 아이는 이 남자를 잘 따랐다. 정말 바른 생활의 남자처럼 보였다. 나에게도 볼 때마다 가벼운 눈인사를 했다.
결코 음흉하다던가 천박한 웃음이 아닌 미소를 띄우면서...
그런데 어느날부터 그는 나에게 도 사늘하게 대하고 주위의 모든 사람과 도 대화를 끊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자주 놀러 와 부르는 찬송가 소리도 최근에는 전혀 듣지 못했다.
나는 그가 왜 베란다에 서서 하염없이 금정 산을 바라보는지 늘 궁금했다.
(저 산너머가 궁금할까?)
나도 이전에는 저 산너머가 궁금했으나 이젠 그렇지 않다.
그는 문을 두고 마치 저 베란다로 나가볼까 하는 사람 같았다.
(항상 밝은 자신의 낮의 세계에서 어두운 세상 밤의 세계로....)
언제 부 턴가 나도 그가 없는 동안 베란다에 서서 검정 산을 한참을 바라 보곤 한다.
나도 서서히 그가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나의 정신은 그의 주위에 앉아 있다. 뒤 그림자에.. 그의 발자국 소리에….피로한 먼지처럼….
어떤 때 그가 베란다에 있으면 관심을 끌어 보려고 샌달 소리를 요란하게 질질 끌며 나가본다.
그러나 그는 눈길 한번 안주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래에서 천리향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삐쭉한 잎들이 가슴을 찌르는듯 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집착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가 일요일 교회를 가면 나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지만 그가 믿으니 웬 지 나와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날 싫어 할지도 모른다. 천박하고 세상적인 술집여자라고….어쩌면 하나님은 그렇지 않을지도...
세상의 관념이란 참 우습고 불합리하다.
세상이란 술집에 다니는 여자는 다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밤이 다 천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 * * * *
이 생각 저 생각에 너무 우울해 출근하려 정성 드려 한 화장을 다 지웠다.
미스 김에게 전화를 했다.
"사장님! 왜 안 오세요?"
콧소리를 내며 애기의 응석이 같은 말투를 냈다.
나는 말소리에 가식을 썩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 말투가 좋은가 보다. 미스 김의 목소리가 귀엽다고 칭찬하는 여러 남자들이 있다.
"몸이 안 좋아 오늘은 가지 못하겠으니 외상 술 주지말고 퇴근시간에 가계 문 잘 단속해.."
온갖 호들갑을 떨며 어디가 아프냐고 걱정스럽게도 물었다.
분명 전화를 끊자마자 얼마 전에 본 놈 팽이 같은 놈에게 전화할 것이다.
이곳의 습성상 어떤 놈이든 애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것들은 능력이 없고 어떤 자는 능력은 되지만 유부남인고로 여건이 안되어 여자를 집에다 들여 안칠 입장도 아니면서 마누라나 된 듯 질투가 더 심하다.
그런 줄 알면서도 애인 없이 혼자 있는 아이들이 잘 없다.
컴퓨터를 켰다.
[보낼 사람: COSMOS@kornet.net
COSMOS님..
저는 오늘 매우 우울해요...
거절이 두려워 저의 자존심은 사랑을 볼 수 없어요...
저는 오늘 매우 우울해요...]
보내기 버턴을 눌렀다.
요즈음 통신 속에 그는 답장이 없었다.
항상 나의 낮이 되어주었던 그...
무슨 바쁜 일이 있는 걸까?...
분명 그는 편지를 읽었는데 답장이 없다.
대화의 상대가 없어진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다.
그것은 항상 만나던 친구가 죽었다던가 매일 함께했던 애인이 변심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