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도 없이 불쑥 집안으로 들어서는 딸에게 놀라는 표정을 감추
지 못하는 엄마를 뒤로 하고 안방으로 향했다.
"아버지. 은수 왔어요."
"안계셔. 도대체 넌?..."
안방엔 재민이만이 이불을 다걷어찬 채로 자고 있었다.
'내 아들!'
오로지 이세상에 재민이와 나만이 남겨진것 같은 서러움이 솟
아 올랐다.
"얘는 지엄마도 잊어 버린거 아냐? 섭섭하네..."
엄마 앞에서 무너질것 같아 간신히 감정을 누르며 아이의 이불
을 덮었다.
"괜히 자는애 깨우겠다. 이리나와."
미심쩍은 눈길로 딸을 쳐다보던 엄마는 부엌으로 가신다.틀림없
이 저녁도 못먹고 왔으리란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잠든 아이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지아빠에게 어떤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관심도 없다는듯....
'너한텐 상처 안줄거야. 절대...절대로...'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아이의 평온함을 지켜주리란 다짐을 하고 문을 닫았다.
"우와! 찌게냄새 좋다. 나 이냄새가 너무 그리웠어.엄마."
"그래 고작 찌게 냄새 맡으려고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니?"
웃었지만 가슴이 저려온다. 뭐라고 말씀드릴까? 남편에 대해선
시어머님 보다 더 애착을 보이시는 엄마에게 내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어쩌면 나보다 더한 배신감과 실망감
으로 상처입게 되실지도 모른다.
"너. 박서방하고 다퉜니? 왜? 바깥일 하기도 힘든 사람 속은 그
렇게 썩히니. 내 딸이지만 집에서 편히 벌어다 주는 돈 받아 쓰
면서 남편 마음하나 편하게 못해주는건 엄만 도저히 못봐준다."
밥만 꾸역꾸역 먹고 있는 딸이 이내 못마땅 하신지 엄마는 말을
이었다.
"지금껏 목소리 상해 전화 한번 않튼 박서방이 술먹고 전활 다
했더라. 소가지 못땠게스리 팽하니 친정으로 내달려 오니?"
엄마 얼굴을 보면 또 괜히 눈물부터 쏟아 질것 같아 고개를 들수
가 없었다.
"내일 당장 내려가. 나 너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알지? 박서방
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집으로는 오지마.
집안에서 해결해. 그리고 오래 끌지마. 보기 싫어."
"엄마...."
"니 아버지 수원 작은댁에 가셨어. 내일 저녁때나 오실거야. 아
버지 오시면 괜한 걱정거리 하나 더 느신다. 니아버지 학교 떠나
오시기 전까지 애들 하나하나 걱정하시다 40년세월 다 보내셨는
데....."
그저 고개만 꺼덕였다. 무작정 기차를 탔지만 오면서 내내 후회
를 했었다. 부모님께는 알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늘 사위자
랑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때문에 오빠는 늘 올케의 표
적이었다. 그런 부모님께 얼마나 큰 상채기가 생길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언제나 내방은 비워진 흔적을 감쪽같이 감추고 있었다. 엄마는
멀리 떨어져 보낸딸에 대한 그리움을 내가 떠나간 방을 매일 쓸
고 닦으시며 달래셨다. 계절이 바뀔때마다 커텐이랑 침대커버를
바꾸시고 다 챙겨가지 못한 옷가지를 정돈해 놓으셨다.
잠시였지만 어린 시절로 되돌아 온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럴수 없다는걸 난 안다.
또 꿈을꾼다. 남편은 재민이와 내가 서있는곳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 남편의 슬픈 눈을 보면서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재민이가 운다. 남편은 흔들리는가 싶더니 우리
에게서 천천히 등을 돌린다. 가는구나....이젠 다 끝나는 거야.
남편이 걸어간다. 천천히..천천히..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은수야! 은수야! 눈을 떠. 재민애미야.정신차려!"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
힘겹게 눈을 뜬다. 뭘까? 내 얼굴을 온통 뒤덮은 미지근한것.
또.너구나. 아직도 남은게 있었구나. 이젠 바닥나 버린줄 알았
더니....
"눈을 떴구나. 무슨 꿈을 꾸는데 그렇게 서럽게 통곡을 하니?
세상에. 무슨땀을 이렇게 흘리며 운거야?"
이제는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꿈을 꾸고 있는 내 자신이 실망스럽고 자꾸만 나오는 눈물
이 원망스럽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