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304 동이라구 적혀 있는데, 다 온거 같습니다."
택시 오른쪽 문위에 달려 있는 손잡이만 잠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남편이 살고 있다는 아파트에 도착 했단다.
절대로 혼자 가게 둘 수 없다는 그에게, 운전 안하고, 택시
타기로 하고, 바로 전화 해 준다고 약속하고 왔지만, 속으론 내
가 혼자 가기 더 힘들어 한다는걸, 그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이건 내 가정 일이고, 우리 부부의 문제야. 니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야. 나중에 너무 힘들어서 혼자 해결 못할 때,
그때 내가 도와 달라고 할께."
그랬는데,그가 적어준 쪽지조차 택시 기사한테 줄 만큼
난, 앞으로 닥칠 상황을 막막해 하고 있었다.
"은주예요. 근처 찻집에 있으니까, 잠깐 나와 봐요."
이렇게 말해야만 내 자존심이 안 상할꺼라고 누가 가르쳐 준
적 있었나? 목소리 깔으면서 도도한 척 하지말고,아파트 문
열고 머리 끄댕이 잡으며,다 집어 던지고, 부수고 그래야
그림이 맞는거 아닌가?
그런데, 찻집으로 나온 남편은 오히려 편안해 보였으며, 거기
다가 당당하기 까지 했다
"집으로 들어가서 얘길 하지."
몇 달 만에 만난 남편 이다.
"마치 며칠 전에 헤어졌던 사람들 같네. 우리가 몇 달 만에
만난건지 알기는 해요?"
우리 부부가 몇달 만에 만나서, 인사조차 못 나눌 만큼, 그렇
게 황폐해 진걸까?
"어딜 가서 얘기 하자구요? 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말 맞아
요?"
"그 사람은 지금 집에 있어. 셋이서 같이 얘기 하길 원해."
"당신...지금, 제 정신 맞아? 우리 문젤 왜 그여자랑 같이
얘기 해? 내가 돌은 줄 알아?"
"당신 한테 할 소린 아니지만 그 여잔, 당신하구 달라.
그 여잔, 내가 모든걸 다 잃구, 돌아오자두 못하구 방황할 때
내 옆에서 나를 조건 없이 도와줬던 사람이야. 당신은 이해
못하겠지만 지금도 계속 나한테 집으로 들어가라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 여자도 지금 이자리에 같이 할 수
있다는거야."
이래서, 이런 말을 듣게 될까봐, 남편의 마음이 어떻다는걸
알고 왔으니까 그가 나를 그렇게도 못 가게 말렸던 거구나.
"당신두 큰 소리 칠 입장,아니지 않나? 당신, 나 기다렸다고
말 할수 있어? 당신한테 난 그냥 돈이나 벌어다 주면 어디에
있든 당신은 상관 없어 했던 사람 아니였나? 그래야 당신두
당신하구 싶은대로 누구든지 만나고, 그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구나. 내가 지금 큰 소리 칠 입장이 아니구나.
어디서부터 잘못 되어가기 시작 했을까?
나 였을까? 아님, 남편으로부터 였나?
우린, 그러니까, 말하자면, 안팎으로 놀아난 부부인가?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각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던 거구나.
그거 였구나.
"그래서, 앞으로 어떻 할꺼예요?"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줄듯이 애기하지마요. 나두 당신한테
원하는거 없으니까.당신 마음대로 해."
사실은 나, 여기 오기 전에, 남편 만나면 사정하구,내가 잘못
했다구 하면서 용서를 빌구 집으로 가자구 말 하려구 했었는
데....
"난, 늘 당신이 무서웠어. 당신은 언제나 빈틈없고, 완벽하
길 바라고, 조그만 실수도 그냥 넘어가 주려 하질 않는 사람
이야.심지어 아이들 한테까지...그런 당신을 바라보는 나머지
가족들이 얼마나 기가 질리는지 당신은 모를꺼야. 그랬던
당신이 어린 후배한테 마음을 주기 시작하더군. 처음엔 당신
을 믿었었지. 당신같은 결벽쟁이가 실수 같은건 절대로 안 할
사람이니깐. 그저 친한 후배로 가깝게 지내는구나,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지난번 물난리 났을 때, 신대리 하는거 보면서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이더군. 거기로 향하는 당신의 마음도.
나, 한 때는 당신이 용서 못할 실수도 했지만, 그 때, 그 애
하고의 일들은 솔직히 젊은 날의 객기 정도지. 남자니까. 남
자들은 거의가 한 때, 그런다고들 하더군. 아, 물론 안 그런
남자들도 많지. 그런데, 그 일이 당신한테 그렇게 치명적인
상처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구.그래서 당신이 신대리하구
가까와 지는걸 알면서두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던 거라구. 내가 베트남으로 갔던게,날 붙들지 않는 당
신을 야속해 하면서 갔던게, 우리의 어긋남의 시작이라는거,
당신은 몰랐었을까? 아, 그렇지. 당신은 남자의 바깥 일에
참견 안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겠군.그래서 어디가서 무슨 일을
하던지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지. 그렇드래
도, 나는 당신한테듣고 싶은 말이 있었어. 현지에서 전화할 때
한번이라도 힘들지 않냐고 묻질 않더군. 당신이 그렇게 날
외면할 때 지금의 저 사람을 거기서 만났던 거지..."
"됐어. 그만해. 난, 당신이 그여잘 어떻게 만났는지 그런게
궁금한게 아냐..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이러고 있는건,모두 내
탓이란 말을 하고 하고 있는건데,...인정해. 나 당신한테 많이
잘못하는거 알아. 그렇지만, 결혼후 10 년 동안은 이러지 않았
았어.내 성격 땜에 힘들어 하는 당신을 몰랐던건 아니지만 큰
문제 없이 잘 살아 왔었잖아.... 지난 얘기 하자고 온건 아니
니깐, 그만 할께. 그래서 앞으로 어떻 할꺼냐구?
"시간을 좀 더 줄 수 있을까?"
"마음대로 해. 아이들 문제만 잘 될수 있다면, 이쯤에서
이혼하는 것두 괜찮겠네."
아니였는데, 이게 아니 였는데. 여기 올 때는 이렇게 모질게
굴지 않으려고 했는데, 왜 난 남편 앞에서는 자꾸만 정나미
떨어지는 말들만 골라서 하게 되는 걸가?
*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분명 택시가 굴러 다니는 아스팔트
위를 달려 왔는데도,난 가시 덤불 속을 헤쳐 나온 사람처럼
몸도, 마음도 아프고 쓰라린 물집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가게가 아닌 집으로 곧장 왔는데, 그 때까지 거기서 날 기다
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 내게 또 한 사람이 있구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내 옆에만 머무르려고 하는 저
바보 같은 사람을 이젠, 정말 보낼 때가 된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