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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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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BY 이나래 2000-10-06

그가 없는 서울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마였다.

비 오는 거리를 하염없이 내다 보고만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밥 먹는 것도 싫었고

잠자는 것도 싫었고, 말하는 것은 물론,숨쉬는 것조차 하기 싫었

다.오직 한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비를 쳐다 보면서, 어느새

슬며시 내 가슴 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그가, 나를 떠나서 멀

리 가고 여기엔 없다는.........그가 나를 피해서 서울을 떠났다

면 나도 마땅히 그를 잊어줘야 할텐데, 그의 부재를 확인한 순간

부터 넘쳐나는 그리움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부터 나도 너 없이, 너 안 만나고 사는 연습, 나도

해야하는 거니? 그래, 나도 너 모랐을 때 삼십 몇년을 잘 살았

었으니까, 살 수는 있을꺼야. 그렇지만 너와 함께 보냈던 지난

일 년의 세월속에 묻혀 있는 그 많은 추억들이 점점 더 또렷이

느껴지는거, 너 아니? 이렇게 쉽게 갈 꺼면서.................

비는 밤새도록 쏟아 붓고도 낮에도 단 한 순간도 그치지 않고

내리고 또 내렸다. 그는 비를 싫어하는데 어떻게 견딜까? '에이

비오는거 너무싫다,난, 하늘에서 뭐하는거 다 싫어요. 비오는것

두, 바람 부는것두, 눈 오는거 까지두요.' 바람불며 비가 오던

지난 가을에 그가 털털거리며 했던 말들이 귀를 간지렵히며 그리

움에 또 빠뜨려 놓았다. 가질수 없고, 또 가져서는 안되는 것에

는 집착이 더 가는가 보다.

비는 연일 계속 내렸다. 몇십년 만의 폭우라고 했다. 서울 곳

곳에 지하철이 끊기고, 선로가 파괴되고, 비행기가 뜨질 못하고,

물에 잠기는 동네가 생기면서, 그 피해가 우리집까지 미쳤다.

그 무렵, 남편의 사업은 더욱 번창해지고 있었다. 수출이 주

업무인 그의 사업은 달러의 급등으로 환차익을 보게 되어 IMF의

여파가 그를 더욱 바쁘게 만들었다. 해외 출장도 덩달아 많아졌

고, 한 달이면 일주일도 채 집에 머무를 시간이 없었다. 어쩌다

같이 잠이라도 자게 되면 피곤하다며 내 손끝조차 건드리려 하지

않았으며,또 잠자리를 한다해도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렇다며,

일방적으로 자기 혼자 사정해 버리곤 이내 등돌리고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미안하단 말은 했었다. 다음번엔 잘 해주겠다는 말

도 했었다. 그렇지만 남편과의 잠자리는 그 다음에도, 또 그 다

음에도 늘 같았다. 그는 늘 피곤 했으므로....


매장이 있는 동네가 침수 되기 시작했다. 남편은 미국 출장 중

이었고, 전화를 걸었을 때 올 수 없다고 했다. 가게가 물에 잠기

는걸 보면서, 남편이 돌아 오면 이 번엔 꼭 이혼을 하고 말꺼라

고, 이를 악 물고 있는데도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부부가 뭔데,

난 분명히 들었는데, 기쁠때나 슬플때나 아프거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늘 함께 하면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하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언제나 따로따로인걸, 저 매장을

어떨때, 어떤 상황에서 시작했는지 조차 잊은걸까? 내가 저 매장

에 쏟아부은 정열이 얼만데,저걸 저렇게 물속에 쳐박아 놓다니.

차라리 내가 물에 떠내려 가고 말지 .....아, 어쩌지? 서랍 속에

그가 준 반지가 그냥 그대로 있는데, 반지를 보면 그가 더 그리

울거 같아서 차마 끼지 못했는데.....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앞에 그가 왔다. 거짓말처럼 그가 왔다. 이런건 영화 속에서

나 생기는 일인줄 알았는데......

"뉴스보고 놀래서 왔어요. 어떻하죠? 어떻해요?"

"...어떻게, 뭘 타구 왔어? 언제 온거야? 어떻게 알았어?"

"뉴스보고 알았다니까요.이 동네 침수 될꺼라구 계속 방송

했었어요. 근데, 왜 이러구만 있었어요? 방송 안 봤어요? 사장

님은요? 어디 계셰요? 왜 혼자 있냐구요?"

"그이 출장 갔어. 올 수없대."

"그럼 나한테 전화라도 미리 하지 왜 안 했어요?"

"전화하하구? 나 물래 번호 바꿔 놓구 어디다 전화하라구?"

"...미안해요. 번호 바꿨다는거 깜박했어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보고팠던 그리움에, 매장이 침수되서 속상했던 안타까움에, 남

편의 무성의함으로 생겼던 분노까지, 그가 나타나서 미안하단 말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다 서러움이 되어 주저 앉아서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 미안해요. 내가 서울에 있었으면 좀더 일찍 손을 쓸수

도 있었는데, 사무실에 보험처리 되나 알아봐 줄께요."

"괜찮아, 매장에 있는 물건 걱정은 별루 안했어."

"왜 걱정을 안해요? 그럼, 뭐가 걱정이예요? 선배가 저 매장

을 어떻게 차렸구, 난요? 내가 그 매장에서 얼마나 많이 변한줄

알기나 하구선 그런 소리해요? 저 매장은 나한테 선배나 마찬

가지라구요."

" ?..... 화를 왜 니가 내?....."

"....선배!..."

"....나 한 번만... 안아...줄...래?"

이러면 안되지만, 정말 이러면 안되는줄 아는데,그가 이 빗속에

나타났을 때부터 난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그래두 돼요? 난 선배 보자마자 안아 주구 싶은걸 혼 낼

까봐 여태 참았다구요."

"너 바본거, 너 모르지?"

생전 처음 안긴 그의 품은 작았지만, 포근했다. 그의 심장 고동

소리가 장마 천둥소리 보다 더 크게 내 귀에서 울렸다.

"정말 바보네. 아줌마 한번 안아 주면서 심장이 왜 그렇게 빨

리 뛰어?"

"우이씨! 아뭏든 선배는 폼 좀 잡으려면 꼭 옆으로 샌단말야"

"다른거 생각하지마. 그냥 빗속에 집 떠내려간 아줌마 건져서

안구있는 거라구 생각해."

"선배! 난 선배가 그래서, 늘 이런 사람이어서 내가 선배를

더 사랑하는거 알아요? 이렇게 편하게 해주는 선배가 얼마나 좋

은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욕심이 나는지...선배가 이런 사람이

어서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