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장을 오픈하는날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서 나를 도와줬던 사람
도 남편이 아닌 신대리였다.그 날 늦도록 술을 마신 그와 난 많
이 취했었고, 술 취한 그로부터 그의 성장얘기를 고백처럼 들으
면서 난, 또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선배님, 아니 은주씨, 것두 어색하다.누나라구 생각하구 말해
두 되죠? 열두살 차이면 얼마든지 누나가 될수 있잖아요."
"그래, 그럼 이제부터 나두 말 놓는다. 어차피 퇴사했구 나보
다 어린건 확실하니까. 나, 누나 소리 듣는거 디게 좋아하는거
모르지?"
"그랬어요? 그럼 진작부터 누나라구 부를걸, 내가 누나 처음 봤
을때, 왜 더많이 화를 냈냐면요, 우리엄마 생각이 나서 그랬어요
나요, 우리엄마하구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요. 내동생은 이제
열살이라구요.엄마가 어쩌면 선배, 아니 누나보다 나이가 더 적
을지도 몰라요. 근데 하두 고생에 쩔어서 할머니처럼 보인다구요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아빠한테 듣고 자란 말이 뭔지 알아요
술만 마시면 느이 엄마 찾아가란 말이었어요, 내가 우리 친엄마
가 어디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가출도
여러번 했었고, 그럴때마다 날 붙잡아준건 새엄마였죠. 중학생이
되기전까지 난 친엄만줄 알고 살았어요. 아마 아빠만 아니였으면
난 영원히 새엄만줄 몰랐을꺼예요. 호적이 한 이십년쯤 잘못?榮?
고 해도 믿기울 만큼 고생에 쩔었거든요.공장가서 허리가 휘어지
게 일해서 번돈은 고스란히 알콜중독 아빠한테 다 갖다 바치고
그러면서 왜 도망두 못가구 아빠 곁에 있냐구 물었더니,글쎄, 우
리 아빠가 불쌍해서 그렇대요.자기마저 버리고 가면 완전히 폐
인이 된다구, 죽을때까지 아빠곁을 지킬꺼래요. 울엄마요, 사람
이 아닌가봐요, 아마, 날개가 없어서 그렇지 분명 천사일꺼예요.
그런데, 우리 새엄마도 젊은데 죽도록 일해서 받는 봉급이 얼마
나 되겠어요? 근데, 선배는 뭐예요?처음 봤을때, 너무 행복하구
편해 보였다구요,그냥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 저런 사람이 뭣하러
취직했을까? 또 며칠이나 다니다가 애 핑계대고 그만둘까_ 뭐 그
런 생각이 들었었거든요.미안해요, 함부로 생각했었다면 용서하
세요. 나 직선적인거 아시잖아요. 그리구 나, 지금 많이 취했어
요.내 얘기 아무한테나 안해요. 꼭 취중이라 얘기하는건 아니구
요,선배가 편해서 그래요. 누나소린 잘 안나오네요.선배님은 모
를꺼예요,내가 대학 사년동안 학비 마련을 어떻게 해서 어떻게
졸업했는지, 그런 아빠 밑에서 어떻게 버텨 왔는지..."
"잠깐, 그만....얘기..하면..안 되겠니? 그래, 많이 힘들었겠
구나, 근데, 내가 남들 보기에, 아니 신대리 보기에 마냥 편안
한 여자루만 보이디?무슨 근거루 날 시간이나 때우려고 직장다니
는 여자라구 생각했을까?그런 사람이 그렇게 죽기살기루 열심히
일을했을까?"
눈물이 마구 쏟아져서 더이상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이사람이
나에 대해서 뭐를 알겠어, 이 사람이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은 슬픈 냄새가 어디에선가 풍기는가
어떻게 알았을까, 나도 저와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운명을 타
고 났음을. 그렇게 나도 컷음을. 나도 아버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면서 내 사춘기를 보내고, 얼음처럼 차가운 엄마 밑에서
내 친엄마는 천사일꺼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면서, 그렇지만
난 절대로 내 친엄마를 찾지는 않을꺼라고 다짐하면서, 혹, 그쪽
에서 먼저 찾아와도, 절대 엄마라고 인정하지 않겠노라고, 수도
없이 다짐하면서 날 키워주신 엄마보다 난 더 차갑고 냉정한 사
람이 되길 원했었다.
"이리와봐, 내 눈을 잘 봐. 내 눈속에서 행복을 가장하려는 슬
픈 영혼이 느껴지나 잘 보라구. 너만 불행한거 아니야. 억울해
하지마, 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줄 아니? 행복하게 태어난
사람 뒤에는 행복만 줄서있구,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 뒤에는
구구절절이 불행만이 악착같이 따라다니는거, 넌 아직 모를꺼야.
아무리 힘껏 뒷발로 걷어차도 나만 따라오는 불행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단다. 난 그냥, 그렇게 행복한 사람의 비교 대상으로 태
어났나부다하구 그냥 살아."
" 난 아니예요. 그리구 선배두 아니예요. 누가 그렇게 살으래요
선배 다 살았어요? 이제 겨우 반두 안 살았으면서 칠십먹은 노파
처럼 굴지마요.바보같이 굴지말라구요. 가게 오픈하면서, 살아보
려구 그렇게 악착같이 굴면서 ....."
그와 난 왜 만났을까? 무슨 신의 장난으로 그를 내게 보냈을까
눈물을 철철 흘리며, 아기를 안듯 그를 가슴에 꼭 끌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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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로 그는 거의 매일 가게엘 왔었다. 낮엔 매장 관리
차 왔었고, 저녁엔, 비가 오는 날엔 우산이 없다는 핑계로 우산
을 빌리러 왔었고, 또 어떤날은 파트너 땜에 열받아서 옛날에 선
배가 자기 길을 잘못 들였다고 책임 추궁하러 왔다고 하고, 그러
다가 가끔 남편하고 부딪칠때도 있었지만 그 자리를 피해 주는건
그가 아니라 언제나 남편이었다. 오히려 내 앞에서 당당하고 씩
씩한것도 그였고.
어느날 남편에게 물은적이 있었다.
"당신 신대리 앞에서 왜그래?"
"내가 뭘?"
"왜, 당신이 먼저 피하구 그러냐구,"
"그거야 당신이 신대리하구 더 잘 통하구, 할 얘기두 많은거 같
으니까 둘이 얘기하라구 그런거지, 별걸 다 가지구."
"별걸 다 가지구가 아니라, 당신두 같이 들어두 되는 얘긴데
당신은 꼭 구경하는 사람같으니까 그러지.전혀 모르는 분야두
아니구 같은 계열인데 얼마든지 같이 얘기할 수 있잖아."
" 난 당신 일에 간섭하거나 끼어드는거 싫어. 당신두 그랬잖아
나 사무실 처음 차릴때 당신 전혀 상관 안했잖아. "
"그럼, 그 때, 그거 섭섭했었어? 내 성격이잖아. 남자 바깥일에
간섭안하는거, 내 성격인거 알잖아. 그래서 된통 당했지만,"
"지나간 얘긴 관두지 그래. 그리구 섭섭한거는 없었어. 당신 성
격을 아니까. 그래서 나두 당신 하는 일에 간섭 안한다는 말을
하는것 뿐이라구."
우리 부부는 어쩌면 영원한 평행선을 가야만 할 꺼라는 생각이
그 때부터 들기 시작했다. 일을하다보면 사소하게 남자의 도움과
조언이 필요할때두 있는데 그 때마다 내옆엔 남편이 아닌 신대리
가 나를 도와주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