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내게 남은 삶의 의미 (5)
전에 내가 지내던 이층의 방을 둘러보았다. 더 이상 아픔으로 지
난날을 새기지는 않으리라,이제 모두 강물에 띄우듯 흘려 보내
고 나는 바다에 이르리라.. 이모방에 들어가서 사진 속에서 다정
히 웃고 있는 이모와 이모부에게도 작별인사를 했다.
- 두 분, 모두 잊고 편히 쉬세요. 저도 잊을게요. 그리고, 사랑
해요....
누군가 찾아 왔다는 아줌마의 전갈을 받고 방에서 나올 때까지
나는 그 사람이 신애인 줄 알았다. 서울로 올라와 배웅해 주겠다
고 하는 걸 극구 사양했었는데, 아마도 언니와 함께 온 거라고
나는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승준의 어머니 였다.
내게 치뤄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일까..나는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집인 양 익숙하게 쇼파에 앉은 그녀는 턱으로 나에게 앉으
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받은 하녀처
럼 시키는 대로 앉았다. 거기 까지 였다. 고분고분했던 나는...
"어쩐 일이세요.."
"아이 보러 왔다."
"네?"
"감쪽같이 나를 속이고,,너란 애는 정말 발칙하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하기는, 이 집이 누구 집인데 집주인 다 잡아 먹고, 여기 들어
올 엄두가 나는 걸 보면 독하고 모질지 않으면 못할 일이지."
"저, 더 이상 이런 말씀 들을 이유가 없네요.."
"아이, 어디 있니?"
"......"
"다 듣고 왔다. 니 마음대로 낳고, 니 마음대로 끌고 가겠다고?
너같은 애한테서 받은 핏줄 찜찜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가문의 장녀인데 니가 키우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웃음이 비죽비죽 나오는 걸 억지로 참느라고 이를 악물었
다. 그런 나를 울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울 것 없다. 소송을 해서라도 찾고 말테니까. 새 출발하거라.
너를 위해서도 그게 좋다. 나이 서른이 갓 넘어서 미혼모로 산다
게 어디 말이 쉽지.. 너 같은 애한테는 더더구나..."
"이보세요.."
"뭐라고?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니?"
"한 번 해 보시지요..애를 낳으면 입양을 시켜 버리겠다고 하신
분은 누구시던가요? 그보다도 먼저 깡패들을 시켜서 성폭행이라
도 시켜 버리겠다고 그런 적도 있으시지요...한 번 해 보지요
뭐. 대 유진그룹 사모님이 어떻게 한 여자에게 잔인했었는지 다
말하지요 뭐. 여성단체들을 다 돌아다니며 호소해 보지요...재미
있겠군요."
"나한테 아이를 가졌다면 어쩔 거냐고 물었지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지는 않았잖니?"
그 특유의 우아함을 가장한 뻔뻔하고도 유들유들한 모습이 보기
역겨웠다.
"아무튼, 나도 아주머니처럼, 자식을 위해서는 빨가벗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춤이라도 출 거예요. 우리 한번 해 볼까요?"
"독한 년...딸까지 잡아먹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년이다. 너
는."
나는 벌떡 일어났다. 도도한 왕비같던 그녀는 내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에 잠시 움찔했던 거 같다. 그러나 곧 본래의 모
습을 회복했다. 아무래도 니가 나를,,감히..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게 나를 더 화나게 했지만 그녀는 나를 몰랐다. 부들부들 떨
며 서 있는 나에게 차갑게 덧붙였다.
"니가 키우는 이상, 그 애도 온전하지는 못할 거다!"
와장창창! 쨍그랑!
부엌에서 음료를 들고 나오던 아줌마는 기절 할 듯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화분 하나가 거실 유리 밖으로 던져지며 산산조각
이 나 버렸다.
"나가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얼른 자리를 피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
며 나는 절대로 화해 할 수 없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거라는 걸 알았다.
깨진 거실 유리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그 때 전화가 울렸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는 나 대
신 전화를 받았던 아줌마는 수화기를 떨어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요 아줌마!"
"나은 엄마! 나은 엄마!"
불길한 생각이 꾸역꾸역 먹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나는 침착하려
고 애쓰며 주저앉아 가슴을 쥐고 있는 아줌마를 향해 낮은 목소
리로 다시 물었다.
"왜..그래요?"
"나은이가,,,사고를....병원에....죽을지도..."
"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