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내게 남은 삶의 의미(4)
"영인아, 영인아..."
멀리서 그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나는 눈
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서 모든 걸 잊는다면, 그래,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은이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겠지. 하지만 잘 견뎌 낼 꺼야.
아빠도 있고, 새엄마도 좋은 사람인 것 같으니까....나만 없
으면 쉽게 해결 될 문제인 것을. 그런 것을..
눈물이 흘렀다. 울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물었지만, 눈물이 흘렀
다.
"영인아, 눈을 떠봐..영인아.."
걱정스러운 듯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영인아. 아픈 데가 있으면 말을 했어야지..바보같이..
미안하다. 내가 나빴어. 나는 니가 새 출발하기를 바랬어. 나은
이를 키우고 싶기도 했지만 너를 행복하게 풀어주고 싶었어..니
가 그런 상태인 줄은..영인아..."
그래도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영영 눈을 감고 싶었다.
"엄마,.."
문이 열리고 나은이가 내 곁에 다가왔다. 그 작은 손으로 나의
이마를 짚으며 나은이는 말했다.
"엄마, 죽지마...."
나는 눈을 떴다. 사랑하는 내 딸, 나은이가 거기 있었다.
"나은아, 걱정하지마, 엄마 안 죽어..."
"아줌마 왜 오셨어요? 아이 놀래게.."
"연락을 받고 경황이 없어서요.."
"엄마 곧 집에 갈꺼야. 나은이 아줌마랑 같이 집에 가라."
"아저씨!"
나은이는 그의 품에 안겨서 울었다. 무엇이 저아이를 서럽게 하
는 걸까.나은이를 품에 안고 그는 아줌마와 함께 병실을 떠났다.
"데려다 주고, 다시 올게. 놀래서 내가 전화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몸 상태가 너무 안 좋다며 의사
는 며칠 입원하라고 했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움직
일 기운조차 없었다.
창 아래로 강이 흘러가는 게 보였다. 내 삶은 흘러서 어디로 가
는 걸까..어느 만큼 가면 멈춰 서서 쉬게 되는 걸까...그런 생각
을 했다.
"언니!"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애였다.
"신애야..."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일어서서 씩씩하게 살아야 내가 마음껏
미워하지!"
"미안하다 신애야..미안해...정말,,미안해.."
그녀는 한 없이 울었다. 남에게 미움조차 받을 수 없는 가여운
처지인가 내가..그렇게 가장 불쌍한 인생이 되버린 걸까. 나는
그녀가 내게 증오를 보내주기를 바랬다. 그래서라도 그녀가 새롭
게 출발할 힘이 되기를 바랬다.
"나를 용서하지마, 신애야..용서하지마.."
결국 내 자궁은 들어내지고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이 되
었다. 감정도 그렇게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그런 상태가 되었
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태가 회복되어 감에 따라 이민을 떠나기 위한 준비도 진행이
되었다. 집은 우리가 떠나면서 비워 주기로 합의했고,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꼭 한번 더 그
가 나은이에게 약속했다며 미니가 그려진 고급 부츠를 사왔다.
앞으로 몇 년은 가지고 놀만큼의 장난감과 학용품, 옷가지들도
함께. 그리고 어느새 찍었는지 스티커 사진도 나은이의 어린이
집 수첩에 붙어 있었다.
그의 아내도 찾아 왔었다. 멀리서 행복 하라고 그렇게 빌어주는
그녀는 정말 그의 어머니가 찾던 이상적인 여자 그대로 였다. 나
는 그들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모든 걸 잊고 우리 모
두 다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내일이면 이제 서러웠던 일만 가득했던 이 땅을 떠나는 날..
나은이는 아침부터 어린이집 친구들에게 작별을 한다며 굳이 집
을 나섰다. 미리 이별 파티도 열어준 후였는데도 고집을 부렸다.
"나, 친구들한테 이 미니 부츠 보여주러 갈 꺼야."
"이제 봄인데 누가 부츠를 신고 가니?"
"아니야, 엄마, 나 이거 아저씨가 사 준거라고 자랑하러 갈꺼
야.."
신발 문수를 잘 몰라서 그랬겠지만, 부츠는 너무 헐렁해서 걸을
때마다 벗겨지는데도 굳이 신고 가겠다는 것을 실랑이를 벌이다
못해 나는 그만 승낙했다. 마지막이니까..그러니까 조심해서 다
녀 오라고 배웅해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