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내게 남은 삶의 의미(3)
-신애야, 용서해.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나는 이제 자궁
이 없는 여자가 된단다.
나를 질투할 가치가 없다는 걸 알려주려고 말하는 거야. 니가 나
를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게 희석되리라 생각하거나, 가엾게 여
겨 달라는 건 정말 아니야. 네가 우리에게 주었던 모든 사랑을
너무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우리는 떠날게..
메시지를 남기고 나는 참회를 하는 기분으로 모든 것을 정리해
나갔다. 이민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인지 해야 할 일도 많
았고, 남아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일도 생각보다 복잡했다.
대학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받고 결국 자궁을 들어내기로 했다.
의사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수술 스케줄을 잡고
나은이에게 알아듣도록 말했다.
"엄마, 많이 아퍼?"
"아니, 병원에 가서 수술만 하면 금방 나을꺼야."
"엄마, 롯데월드는 언제 가는데?"
"오늘 갈까?"
"아저씨는? 아저씨 한테 같이 가자고 하면 안돼?"
"아저씨는 바쁘시거든. 나은이 보러 오실 시간이 없으셔."
"아니야, 엄마, 저번에 만났는데?"
"뭐? 언제?"
"차타고 와서 내렸는데 아저씨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서?"
"나은이 보고 싶었대. 과자도 사주셨는데? 나은이 이쁜 미니 부
츠 사가지고 오신댔는데?"
"미니부츠?"
"응, 효리꺼랑 같은 거."
"그럼 엄마한테 사 달래야지. 엄마가 사줄게."
"아냐, 아저씨가 미니 부츠 사 가지고 나은이 보러 오실꺼야."
나풀나풀 기분이 좋은 나은이는 놀이동산에 가자고 한 일도 잊
은 채 기분이 좋아 마당을 뛰어 다녔다.
"아줌마!"
"네?"
나는 주방에서 일 하는 아줌마에게 뛰다시피 달려갔다.
" 어떤 남자가 나은이를 찾아 왔었어요?"
"아니요,,저번에 나은이 아는 아저씨가 사 줬다고,,과자를 들고
왔었는데...왜요?"
"언제요? 며칠 전에요?"
"글쎄요, 한 사나흘 전이었던 것 같은 데요.."
"그럼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요!"
"별로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해서..미안해요."
"그런 일은 바로 바로 알려주세요!"
온 신경이 곧두섰다. 그가 찾아 왔었다니..그런데도 모르고 있었
다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네, 이사님 실입니다."
"한승준씨 바꿔줘요."
"실례지만 어디 신데요?"
"손영인이라고 해요."
잠시..수화기 저쪽 멀고 먼 나라가 느껴졌다. 그는 어느 새 아버
지 회사의 이사가 되어 있었던가. 절대로 이어받지 않고 자립하
겠다더니..젊은 시절 한때의 치기에 불과 했었던 말을, 나는 어
리석게도 믿었던 거였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
"전화 바꿨습니다."
정중한 그의 존댓말에서 나는 벽을 느꼈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나은이를 만나러 온 것이었을까.
"나예요.."
"잘 지냈어?"
"나은이를 보러 오셨었다구요?"
"이런, 둘 만의 비밀로 하자고 했었는데, 그만 들켰군."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유쾌하게 말했다.
"다시는 찾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 "
"뭐라고요?"
턱이 덜덜 떨려왔다.
"약속,,했었잖아요?"
"내 딸이기도 하니까, 볼 수는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안돼요, 당신은 그러면 안돼요. 당신 아내에게 말할까요? 결혼
전에 숨겨 놓은 아이가 있다고요?"
"영인아!"
"영인아, 만나서 얘기하자.."
나는 바람처럼, 이 땅에 닿지 않는 허깨비처럼,그렇게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를 만나러 갔다.
"제발 우리를 모른 척 해 줘요. 곧 떠날게요. 당신에게는 다른
아이가 생길 거잖아요. 나에게는 나은이 밖에 없어요. 제발, 우
리를 보내 줘요.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요."
"나은이도 아빠를 만날 권리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
어?"
"네, 커서 모든 걸 이해하게 될 때가 오면, 그때는 알려 주겠어
요. 제발, 그때까지는 우리를 내버려 둬줘요."
"그 때에는 내가 나은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나은이가 정상적으로 커서 잘 살기를 바
란다면, 내게 보내 줄 수는 없겠어?"
"당신이라는 사람,,왜 이렇게 변했어요? 당신 어머니처럼,,갖고
싶은 건 무엇이든 다 가져야 겠어요?"
"영인아..그게 아니야."
"정말, 당신을 사랑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나는 어이없이 눈물이 났다.
"너를 보듯이 그렇게 곁에 두면 안될까.."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도, 당신 아내는 우리 나은이가 결코 고
울 리 없잖아요. 당신 가정을 지키세요. 제발 괜한 사람에게 고
통을 주지 말아요. 우리 둘이 벌인 일이잖아요. 더 이상 다른 사
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진 말아요..네?"
나는 울면서 호소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아내 얘기를 꺼냈는
데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불안해서 물었다.
" 아내에게 ,,말한 건 아니지요?"
"영인아, 새로 출발해, 나은이는 잘 기를게. 아내도 동의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