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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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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삶의 의미 (2)


BY 로미 2000-10-05


25. 내게 남은 삶의 의미 (2)


비틀거리면서 나는 거리를 걸었다.


-나은이를 보살필 수 있게 되었잖아, 암은 아니라 잖아, 너한테

필요 없는 부분이잖아, 그거 하나 없애고 나은이를 잘 키울 수

있는 데 도대체 뭘 서러워하는 거니?

들어올 때 마음 다르고 나갈 때 마음이 다르다고, 넌 나은이만

키울 수 있다면, 하고 바랬었잖아. 그런데 왜 이러는 거니?


왜 그러는지 나도 나의 이 상실감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거세당

한 암컷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수컷만 거세를 당하는 줄 알았

다. 그런데 나도,,,,이제 더 이상 남자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랑에 그만큼 데었으면서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

는 건지...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온전히 나은이의 엄마로서 남은 생을 마치면 되는 거였

다. 나에게 남은 숙제는, 풀어야 할 몫은 그것뿐이었다. 온전히

감당하겠다고 들었던 잔이었다. 지독히 쓰더라도, 그게 나를 향

한 독일지라도 끝까지 마셔야만 했다. 어느 정도 나를 추스렸다

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대문 가

에 쓸쓸히 기대어 있는 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남아 있는 숙제

는 그곳에도 존재하는 거였다.


"혁진씨...어떻게,,여기를..."

"꼭 할말이 있어서요."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두 시간 전쯤이요."

"무슨 일인데요?"

"어디 좀 들어갈까요?"


찻잔을 마주 놓고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바

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신애 얘기..어제서야 들었어요. 그렇다고, 헤어졌단 말인가요?"

"신애에게 말을,,했어요. 영인씨를 사랑한다고요..."

"뭐라고요?"

"신애에게 감출 수는 없었어요. 그건 신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

까요. 그런데 신애는 알고 있었다고,,그래서 아이를 가졌다고 했

다고,,,하더군요. 그런 채로 결혼 할 수는 없었어요."

"왜, 좀 더 진작 알려 주지 않았어요? 아,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신애 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놀러 오라고,,세상에, 나

같이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신애는 나를

만나면 침이라도 뱉고 싶을 거예요."

나는 고통으로 내 몸이 흩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회와

자책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이제 이 모든 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건지... 나는 정말 대

책이 없는 가증스러운 인간인 걸까..

"영인씨..이제 나와 함께 가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사랑에 눈 멀어버린 가엾은 또 한사람을 바

라보았다.

"어디를 요?"

"남은 미래요."

"잘 들어요. 나에게는 혁진씨와 함께 하는 미래는 없어요. 신애

와 어찌 되었던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말아요. 나는 곧 떠날 거

예요. 나은이와 함께요."

"사랑해요..얼마나 보고 싶었는지..함께 가요."

나는 그의 영혼이 잘못된 사랑 때문에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최대한 차갑게 그를 향해 비수를 던졌다.

"설마 아이처럼 하룻밤을 지냈다고 책임지라고 하는 건 아니지

요? 내가 재산이 많아진 과부라서요? 혁진씨의 발판이 되어 줄

것 같아서요? 가난한 집안을 일으킬 토대가 될 거 같아요? 집에

서 과부라도 상관없대요? 갑자기 유산이 많아진 과부라고 말했나

부죠?"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내게 물을 끼얹고 무섭게

노려보다가 나가버렸다.

"다시 오지 말아요!"

나는 그의 등뒤에다 그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나의 최선

의 보답이었다.


나은이는 나를 기다리다가 지쳐 잠들었다. 다시 어린이집에 가

고 싶다고 말했다며 보내는 게 좋겠다고 아줌마는 얘기했다.

"이민을 가든 어쨌든 혼자 너무 심심해서 안 되겠어요. 당분간이

라도 가야하지 않겠어요?"

"그럼 알아보죠."

"제가 알아봤어요. 시설도 깨끗하고, 집도 가까워서 차도 오래

안 타도 될 것 같고,,2시쯤 마치니까 괜찮지 않겠어요?"

"그래요 아줌마,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집도 계약하겠다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쩌 실 거예요?"

"팔아야 겠지요. 당분간 떠나기 전까지 사는 조건이면 만족해

요. 그리고 아줌마, 내가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아줌마는 알았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내가 조카딸처럼 안된 생각이 든다며 안스러워 했다. 고용된 관

계를 넘어서 그녀는 내게 남은 마지막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