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사랑이 머물던 자리(3)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졌단 말이 사실이란 거지. 엄마가 자살
을 시도하셨고, 니가 떠나고 내가 유학을 다녀오고,,그리고 내
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 게 사실이란 말이지?"
"사실 이예요."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요사 채 안에서 그와 나는 마주 앉
아서 얘기를 나눴다. 나은이는 공양주 할머니를 따라 놀러 갔
다. 공양주 할머니는 부모님이 돌아 가셨을 때부터 그곳에 계셨
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나와 나은이가 너무나 똑같아서 놀랐
다고 아는 체를 해 주시고, 아이를 예뻐해 주셨다
"사실이라고,,,,그런 일이 일어났었던 게..."
머리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그는 중얼거렸다. 나는 조금도 흐
트러지지 않게 나 자신을 추스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바로 결혼 ,,할 수 있었니?"
"혼자 내려간 지방에서 식당 일을 했었어요. 그 집 주방장 아저
씨는 나이 든 총각이었는데, 아무 것도 의지할 사람 없었던 나
를 아껴 주었죠. 그냥 결혼했어요. 어울리는 사람끼리요. 자동
차 사고로 죽지만 않았다면 아마 나는 행복했을지도 모르죠. 불
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가 물어 올 날을 대비해 열심히 준비해 둔 각본이었다. 거짓
말하는 데 이력이 난 사람처럼 나는 아무렇지 않게 외워둔 대로
말했다.
"말도 안돼...그럴 리가 없어..."
그는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나는 바짝 긴장했다. 그는 아직 환
자였는데, 발작이라도 일으키게 될까봐 겁이 났다.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조용하게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요, 집으로요. 당신 어머니와 아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요. 모셔다 드릴게요."
"너 같으면 생전 보지도 못한 여자가 아내라고 하는 데 너라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니?"
"시간이 지나면 점차 좋아지겠죠. 승준씨, 인정해야 돼요. 우리
는 벌써 너무 많이 비껴 왔어요. 이제 돌아가요. 전 괜찮아요.
정말 이예요. 돌아가야 해요..당신은. 당신 부인이 얼마나 당신
을 사랑하는 지, 당신을 얼마나 기다리는 지...그걸 안다면,,,
돌아가야 해요."
"그러면 너는? 너는 나를 기다린 적이 없었니?"
"네 없었어요... 짐을 싸서 떠나온 그날부터 한 번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 어머니 정말 지긋지긋 하다고,,그랬잖아
요."
"그만해! 그만해!"
그는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멀리 수풀 쪽으로 사라지는 그를 쫓
아 갈 힘도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마루 끝에 걸터앉은 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은이의 웃음소리 같았다. 이곳에 처음 왔
을 때가 생각났다. 둘이서 손을 마주 잡은 채 들어서면서 우리
는 경건한 의식을 치르려는 사람들답게 긴장해 있었지만, 행복했
었다.
행복한 나날들...그런 날들이 며칠이나 내게 있었던가. 행복은
짧았고 그 행복으로 인한 고통은 너무나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보살님..."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내 곁에 다가와 계시던 주지스님이 조용
히 나를 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고요하게 마음을 울리는지 나
는 기대어 펑펑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스님..."
"아주 오랜만이군요. 보살님의 아이를 보았지요. 어린 시절의 보
살님 그대로 군요."
"저를 기억하세요?"
"그 때는 제가 어린 행자승일 때 였지요. 이모님 곁에서 예불을
올리는 걸 봤지요. 그 후에 또 한 번 며칠 전에 여기 오셨던 그
처사님과 함께 오신 적이 있었지요? 그 때는 정말 행복해 보이셔
서 다행이구나 했는데, 왜, 무슨 일이 있으신건가요?"
"스님, 인연의 굴레를 어떻게 하면 모두 다 끊을 수 있을까요?"
"하하,,그것을 다 깨우치시면 부처가 되시는 거지요."
"저는 사람들에게 고통만을 안겨 주는 사람 이예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지는 거 같아요. 그런 저도 살아 갈 이유
가 있을까요?"
"보살님,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모든 건 인연을 따라 흘
러가는 거랍니다."
인연을 따라 흘러간다....어디로...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저녁 공양시간이 다 되어가는 군요. 아기와 처사님은 어디로 가
신 건가요?"
"제 딸아이는 공양주할머니와 함께 나갔는데요?"
"저기 오는 군요."
어디서 만났는지 그는 나은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둘
이서 손을 잡고 석양을 뒤로 한채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
은 가슴이 미어질 듯한 아픔 그 이상이었다. 부녀라는 걸 모르
는 채로 그렇게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걸까...
"엄마!"
얼굴이 노을보다 더 붉게 상기된 나은이는 나를 향해 뛰어오고,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유쾌한 얼굴로 그 뒤에 서 있었
다.
"아빠와 딸이 ...그러고 보니 닮았군요. 나는 보살님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아빠도 많이 닮았네요."
나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주지스님의 그 말을 들은 순간 그
는 하얗게 질려서 나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