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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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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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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머물던 자리(3)


BY 로미 2000-09-30


21. 사랑이 머물던 자리(3)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졌단 말이 사실이란 거지. 엄마가 자살

을 시도하셨고, 니가 떠나고 내가 유학을 다녀오고,,그리고 내

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 게 사실이란 말이지?"

"사실 이예요."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요사 채 안에서 그와 나는 마주 앉

아서 얘기를 나눴다. 나은이는 공양주 할머니를 따라 놀러 갔

다. 공양주 할머니는 부모님이 돌아 가셨을 때부터 그곳에 계셨

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나와 나은이가 너무나 똑같아서 놀랐

다고 아는 체를 해 주시고, 아이를 예뻐해 주셨다

"사실이라고,,,,그런 일이 일어났었던 게..."

머리를 숙이고 가볍게 흔들며 그는 중얼거렸다. 나는 조금도 흐

트러지지 않게 나 자신을 추스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바로 결혼 ,,할 수 있었니?"

"혼자 내려간 지방에서 식당 일을 했었어요. 그 집 주방장 아저

씨는 나이 든 총각이었는데, 아무 것도 의지할 사람 없었던 나

를 아껴 주었죠. 그냥 결혼했어요. 어울리는 사람끼리요. 자동

차 사고로 죽지만 않았다면 아마 나는 행복했을지도 모르죠. 불

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가 물어 올 날을 대비해 열심히 준비해 둔 각본이었다. 거짓

말하는 데 이력이 난 사람처럼 나는 아무렇지 않게 외워둔 대로

말했다.

"말도 안돼...그럴 리가 없어..."

그는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나는 바짝 긴장했다. 그는 아직 환

자였는데, 발작이라도 일으키게 될까봐 겁이 났다.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조용하게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요, 집으로요. 당신 어머니와 아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요. 모셔다 드릴게요."

"너 같으면 생전 보지도 못한 여자가 아내라고 하는 데 너라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니?"

"시간이 지나면 점차 좋아지겠죠. 승준씨, 인정해야 돼요. 우리

는 벌써 너무 많이 비껴 왔어요. 이제 돌아가요. 전 괜찮아요.

정말 이예요. 돌아가야 해요..당신은. 당신 부인이 얼마나 당신

을 사랑하는 지, 당신을 얼마나 기다리는 지...그걸 안다면,,,

돌아가야 해요."

"그러면 너는? 너는 나를 기다린 적이 없었니?"

"네 없었어요... 짐을 싸서 떠나온 그날부터 한 번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 어머니 정말 지긋지긋 하다고,,그랬잖아

요."

"그만해! 그만해!"

그는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멀리 수풀 쪽으로 사라지는 그를 쫓

아 갈 힘도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마루 끝에 걸터앉은 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은이의 웃음소리 같았다. 이곳에 처음 왔

을 때가 생각났다. 둘이서 손을 마주 잡은 채 들어서면서 우리

는 경건한 의식을 치르려는 사람들답게 긴장해 있었지만, 행복했

었다.

행복한 나날들...그런 날들이 며칠이나 내게 있었던가. 행복은

짧았고 그 행복으로 인한 고통은 너무나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보살님..."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내 곁에 다가와 계시던 주지스님이 조용

히 나를 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고요하게 마음을 울리는지 나

는 기대어 펑펑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스님..."

"아주 오랜만이군요. 보살님의 아이를 보았지요. 어린 시절의 보

살님 그대로 군요."

"저를 기억하세요?"

"그 때는 제가 어린 행자승일 때 였지요. 이모님 곁에서 예불을

올리는 걸 봤지요. 그 후에 또 한 번 며칠 전에 여기 오셨던 그

처사님과 함께 오신 적이 있었지요? 그 때는 정말 행복해 보이셔

서 다행이구나 했는데, 왜, 무슨 일이 있으신건가요?"

"스님, 인연의 굴레를 어떻게 하면 모두 다 끊을 수 있을까요?"

"하하,,그것을 다 깨우치시면 부처가 되시는 거지요."

"저는 사람들에게 고통만을 안겨 주는 사람 이예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지는 거 같아요. 그런 저도 살아 갈 이유

가 있을까요?"

"보살님, 자신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모든 건 인연을 따라 흘

러가는 거랍니다."

인연을 따라 흘러간다....어디로...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저녁 공양시간이 다 되어가는 군요. 아기와 처사님은 어디로 가

신 건가요?"

"제 딸아이는 공양주할머니와 함께 나갔는데요?"

"저기 오는 군요."


어디서 만났는지 그는 나은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둘

이서 손을 잡고 석양을 뒤로 한채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

은 가슴이 미어질 듯한 아픔 그 이상이었다. 부녀라는 걸 모르

는 채로 그렇게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걸까...

"엄마!"

얼굴이 노을보다 더 붉게 상기된 나은이는 나를 향해 뛰어오고,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유쾌한 얼굴로 그 뒤에 서 있었

다.

"아빠와 딸이 ...그러고 보니 닮았군요. 나는 보살님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아빠도 많이 닮았네요."

나는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주지스님의 그 말을 들은 순간 그

는 하얗게 질려서 나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