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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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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머물던 자리(2)


BY 로미 2000-09-29


20.사랑이 머물던 자리(2)

수척해진 그녀를 보자 나는 사랑이 그렇게 힘든 일이 라는 걸 다

시 깨달았다. 사람에게 사랑은 기쁨이기도 하고 독이기도 하다

는 걸 알 것 같았다.

"찾아 봐 주시겠어요?"

"그래야 겠지요...찾아서 돌려보내 드릴게요."

"영인씨...미안해요."

그녀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되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지 않으려

고 창 밖을 바라봤다.

"우리 누구도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 하지 않기로 해요. 누구

도 고의로 일을 이렇게 만든건 아니잖아요....찾아볼게요.."

"어머니가 벌써 전에 사셨던,,,봉천동집도 가 보셨대요. 거기도

왔다 갔다는 군요. 번거롭게 찾으러 가실까봐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는 말했다. 남편이 결혼 전이었다고는 해

도 여자와 살림을 차렸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여자는 저렇게 쉽

게 용서가 될 만큼 그를 사랑하는 걸까....그녀는 대체 어떤 생

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잠시 그녀가 궁금해졌다.

"저 많이 미워하셨지요..."

"글쎄요...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들었어요. 영인씨를 미워

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내 남편을 뺏은 것도 아닌데,,,하지만 솔

직히 미웠죠. 전 지금 남편을 찾아서 원래 위치로 돌려놓는 게

중요해요.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기억 저편에 갇혀 있

는 사람을 가지고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 설사 마

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게 있다고는 해도, 그런 것까지 내가

다 차지하려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남편은 현실에서 저를 사랑

하고 있으니까요."

현실에서,,,현실에서 너는 이미 내 상대가 아니다, 라고 그녀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보라고 일러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

다.


"아줌마, 며칠이면 될 거예요. 부동산이나 혹시, 병원에서 없는

동안 연락이 오면 핸드폰으로 알려 주세요."

"네 그래요..나은이는 좋겠네. 엄마랑 여행을 다 가고."

"아줌마 내가 선물 사 올게!"

"정말? 정말이지?"

"네~"

"그럼 부탁 드려요. 자 나은아 가자."

어디 가느냐고 나은이는 물었다. 유아용 안전벨트를 매주면서 나

는 잠시 멈칫했다.

"전에 본 아저씨, 왕자님처럼 멋진 그 아저씨 기억나지?"

"엄마, 정말 그 아저씨 만나러 가는 거야?"

"응, 엄마 친구야. 지금 아파서 저기 산에 있는 절에 계시는 데

거기 가는 거야."

"어디가 아픈데?"

"마음, 마음이 아프대...나은이가 가서 호~ 해드리면 나을꺼야."

"응 알았어."

나은이를 왜 데려 가는 걸까.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몰라,

모르겠어.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그러니까.

경주를 지나 감포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

왔다. 잠시 후면 그를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묻어뒀던 아련

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는 그 곳에 없을지도 모른다. 근거 없

는 믿음이라고, 나의 부질없는 미련일 뿐이라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칠 년 전 그 해 가을이 깊을 무렵에, 나는 그와 결혼식을 올렸었

다. 부모님의 위패가 모셔진 그 곳, 그 작은 절에서 우리는 결혼

했었다. 부모님의 위패 앞에서 서로 위하고 사랑하며 오래도록

행복하겠노라고,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고 서로를 지키겠

다고 그렇게 서약했었다. 그리고, 그 몇 달 후에 우리는 헤어졌

었고 나는 다시는 그 절에 갈 수 없었다. 나은이를 낳고 엄마

생각이 간절했어도 그래서 엉엉 울고 말았어도 그곳에 갈 수는

없었다.


"영인아!"

절까지 이어진 완만한 산길을 걸으며 나은이는 즐거워했다. 딸아

이의 웃음 띤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지었다. 일주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올라오는 사람들을 살피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였

다. 나를 발견해 내자 마자 그는 뛰다시피 달려왔다. 한 점 의심

없이 사랑하는 여자를 향해 달려오는 한 남자의 영혼을 나는 바

라보고 있었다.

"영인아! 니가 올 줄 알았어. 니가 올 줄 알았다구! 얼마나 찾았

는지 아니? 어딜 갔었던 거야?"

나를 얼싸안으며 그는 애타게 찾았던 사랑이 돌아 온 걸 기뻐하

고 있었다. 이 사람의 시간은 어디쯤에서 멈춰져 있는 걸까?

"엄마...."

나은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 웃옷 자락을 잡아 당겼다.

"엄마?"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디서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막막한 심정으로 우두커니 그렇

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