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사랑이 머물던 자리(1)
"집이 너무 고가이다 보니 잘 안나가고 있네요."
이모네 집에서 오랜 기간을 지내 온 아줌마는 주인이 없는 쓸쓸
하고 적막한 집을 혼자 지키고 있었다. 집이 팔리기 전까지 봐
달라고 내가 부탁을 넣었었다. 내가 집을 뛰쳐나온 뒤 들어온 아
줌마라 자세한 건 알지 못했지만, 신경질 적이고 변덕스런 이모
의 비위도 잘 맞춰주었고 이모가 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나은이
를 잘 돌봐 줬었다. 심성이 후덕한 분인 거 같았다. 아이들은 좋
은 사람을 잘 알아본다. 나은이는 아줌마를 좋아했었는데 그런
걸 보면 내 생각이 틀린 건 아닌 듯했다.
"괜찮아요, 당분간 제가 살 꺼 니까요. 아줌마 혼자 힘드셨죠?
팔리면 그때 이사가죠 뭐. 그리고 우리 나은이 좀 잘 부탁드려
요."
"나은이 얼마나 착하고 예쁜데요. 말도 잘 알아듣고, 그런데 무
슨 일이 있는 거예요?"
"제가 몸이 좀 안 좋고요, 할 일도 있고 해서요. 아줌마만 믿고
왔어요."
"저야 뭐 괜찮아요.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어서 가 봐야지
요..."
"네, 그럴 게요."
결국 이모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안방 문은 열어보지 않았다. 이
제 주인을 잃은 그 방의 새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줌마
더러 매일 청소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내가 쓰던 방은
아줌마더러 쓰라고 했다. 그 방에 아직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
다. 나은이는 이층 다락방을 좋아했다. 그 방을 나은이의 놀이
방으로 꾸미고, 나는 일층의 작은 방에 짐을 풀었다.
"할머니네 집에 우리가 사는 거야?"
"응 그래"
"와, 신난다!"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나는 나은이에게 잠시 동안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 주고 싶었다. 언제나 눅눅한 지하 단칸방이었
거나, 허름한 주택의 방 하나에서 나은이는 자랐다. 내 사랑만으
로도 나은이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어쩌면 죽음에
의 문턱에 서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 동안 못 해줬던 모
든 걸 다 해주고 싶었다.그 허영은 나은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를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이모를 담당했던 그 의사는 어느 새 개업을 하고 성업중이었다.
나는 아침에 집을 나서며 나은이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신경미 산부인과
그러나 멀리 간판이 보이자, 나는 가슴이 떨려 왔다.
"손영인씨,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그녀는 웃으며 예의 그 편한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네, 개업을 축하드려요. 그런데 저를 기억하시는 군요."
"네, 왠지 기억에 남았어요. 아주 묘한 매력이 있는 분이라서
요."
"고맙습니다.그런데...저...오늘은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 있나요?"
"저, 출혈이 있었어요."
"평상시 그대로 그냥 멘스도 아니고 출혈이 있었다는 거예요?"
"아니요,,그게..남자와 자고 났더니..아주 많은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출혈이..그러다 곧 멈추었는데요...지금은 괜찮고요.."
남편도 아니고, 남자와 자고 나서 출혈이 있었다고 말한다는 건
너무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그게 내 현실이었다. 이 여의사도
곧 나를 그렇고 그런 여자라고 생각하겠지..나는 이런 얘기를 해
야하는 게 너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의사는 아무렇
지도 않게 계속 질문을 했다.
"남편이랑 관계 할 때마다 그랬나요?"
"남편은 없어요...아이를 낳고,, 육 년 만이었어요."
남자- 라고 한 내 말을 그녀는 남편으로 알아들었나 보다. 하지
만 곧 내가 다시 대답하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말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 것도 나에 대해서 아는 것 없는 사람
에게조차, 내게 약간의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조차, 나는
또 천대시 되는 게 아닐까. 사람들에게 그런 눈길을 받는 게 무
엇보다 싫었다.
"잠깐 볼까요?"
진료대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서 나는 생각했다. 암이 아니길..제
발, 아니길..
"음, 됐어요 내려오세요."
옷을 주워 입고 다시 그녀 책상 앞에 앉자 그녀는 내 긴장한 얼
굴이 안돼 보였는지 따듯하게 웃었다.
"글쎄요, 종양이 있어요. 일단 세포 진 검사,,그러니까 암 검사
를 했거든요. 일주일 뒤에 전화 드릴 꺼 예요. 그리고 더 이상
이 있다면 다시 조직 검사를 할 거구요. 종양이라고 다 암은 아
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가서 기다리세요."
"암 일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다 그런 건 아니 예요. 접촉성질출혈, 쉽게 말해서
성관계로 인해서 출혈이 있다는 건 좋은 징조는 아니지만 그렇다
고 다 암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기다려 보세요. 그런데 아
기 낳고 검진을 한 번도 안 받아 봤어요? 미리 발견했을 수도 있
었을 텐데. 육 개월이나 일년 사이에 한 번씩은 검사를 해야 한
다는 건 알고 있었겠죠?"
"네 그렇지만, 전 아무 증상도 없었는 걸요."
"증상이 없다고 병이 없는 건 아니지요..전화 드릴 테니까 전화
받으시고 다시 나오세요. 단순 종양이라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쉽게 치료가 가능하니까요.."
"네, 그럼..."
병원 문을 나서자 현기증이 났다. 다리가 후둘거렸다. 만약 암이
라면,,그렇다면 나은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어쩌면 이렇게도 신
은 늘 내게 고통만 주는 걸까. 나은이를,,그에게 보낼 수는 없었
다. 울고 짜는 삼류 영화에서처럼 ,,결국 내 삶은 삼류로 막을
내리는 걸까.
나은이를 낳고 처음으로 그 애를 낳은 걸 후회했다.
그 애를, 혼자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면,,,,나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야-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살아 남아야해. 살아 남을 꺼야.
나은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면서 밤을 세우게 할 수는 없어.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이나, 어버이날, 학교 입학식 때마다 그리
고 결혼을 하는 그 날에도 엄마가 없이 나은이가 혼자 엄마를 그
리며 쓸쓸히 지내게 할 수는 없어.
신호등이 몇 번을 바뀌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나는 횡단보도에 그
렇게 서 있었다. 일주일 뒤에..일주일을 가슴 조리면서 나는 그
렇게 지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암이라면,,이모처럼 그렇
게 떠나야 한다면?..아아 모르겠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벌써 여러 번 울렸는데 나는 모르고 있
었던 것 같았다. 아줌마일까? 나은이가 나를 찾고 있나? 짧은 시
간 동안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핸드폰을 열었다.
"네 손영인입니다."
"영인씨, 영인씨 저, 신은정이예요"
그녀는 다급한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 안녕하세요..지금 서울에 와 있어요. 내일 가려고,,했어
요."
"영인씨,,그이가,,없어졌어요.."
"네?"
"승준씨가 없어졌다구요. 퇴원했었는데, 기억이 다 돌아 온 건
아니지만 통원치료를 하면서 집에 있었는데,,오늘 아침에 사라졌
어요. 영인씨를 찾겠다고 메모를 남기고,,,,영인씨! 어디 생각나
는 곳 없어요? 아직 환자예요. 찾아야 해요!"
그녀의 고함에 가까운 외침에 귀가 먹먹해 졌다.
"지금 만나요...만나서 얘기해요..."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직도 사랑이 남아있는 그 추억에 갇
혀서 그는 지금 어디를 헤메고 있는 걸까...그를 찾아내 추억
속에서 꺼내 현실로 돌려보내는 일을... 결국은, 내가 해야 한다
는게 못 견디게 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