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밤꽃 향기
나의 원래 악녀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마다 나를 만나 다치거나 슬프거나 괴로
워하며 평생을 보내게 되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나는
없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면 모든 것은 다 평화로워 지
는 게 아닐까. 내 목숨과도 같은 나은이 마저도 나 때문에 상처
받게 되는 건 아닐까...
죄 없는 신애와 이 사람마저도, 나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
게 고통스러워 하다니. 그를 돌려보내야 하는 데, 그래야 하는
데, 그런데 나는 그의 사랑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이루지 못
할 사랑인줄 알면서도 나를 향해 달려 오는 그의 사랑을 쓰다듬
어 주고 싶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그의 입술이 뜨겁고 서럽게 부딪혀 왔다. 나는 눈을 감고 그에
게 나즈막하게 말했다.
"오늘, 이 밤으로 다 잊고 가야 하는 거예요. 약속할 수 있지
요?"
"네, 네, 약속해요. 약속해요!"
열에 들 뜬 남자의 약속을 다 믿을 만큼 그렇게 순진한 나는 아
니었지만, 그러나 그의 욕망이 채워지면 떠날 수도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모르겠다, 생각은 더 이상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이 내 온
몸에 꽃봉오리로 터져 오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잊
고 있었던 남자의 몸이, 욕망으로 타오르는 불꽃이 거기 있었
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내 머리에 그리고 눈에 코에 뺨에 입맞
추었다. 단단하게 느껴져오는 그의 몸가락이 내 중심에서 느껴졌
다.
나는 어쩔 줄 모르는 초짜처럼 수줍어 하며 떨고 있었다. 내 귀
로 그의 혀가 들어왔다. 뜨겁게 소용돌이치며 그는 내 속으로 들
어오고 싶다고 어서 문을 열라고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전혀 예
상치 못했던 일이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위로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육체를 통해 영혼이 위로 받거나, 육체적인 사랑이 정
신을 지배한다고 믿지 않았지만, 내게 그의 사랑은 뜻밖에도 위
안과 휴식을 주었다. 구름위에 뜬것처럼 아주 따뜻하고 평화로웠
다. 잠들었다가 깨어나 혹시 엄마를 찾을지도 모르는 나은이에
대한 생각도, 지난 과거에 발목이 잡힌 채 힘들어하고 있을 그
에 대한 생각도, 반대하는 결혼의 슬픔 때문에 상심해 울고 있
을 신애에 대한 생각마저도,,,다 잊고 싶었다.
성급하게 셔츠를 들어올리고 그의 입술이 젖무덤을 부드럽게 감
싸자 나도 모르게 몸이 뒤틀렸다.
"아,,나는 지옥에,,떨어질거야...."
그는 아기처럼 젖을 빨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끌
어 안았다. 그의 입술이 아래로 아래로 향할수록 나는 마음속으
로 외치고 있었다. 그래, 나는 지옥에 갈꺼야!
그가 돌진하듯 내 안으로 들어와 그렇게 나는 그와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는 나를 안고 힘차게 질주하고 있었다. 미래는 없었지
만, 그래서 더욱 세차게 달려가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벼랑
저 끝인줄 알면서도,떨어져 죽는 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내 위에 그가 무거운 솜이불처럼 무너져 내릴 때, 어디선가 밤
꽃 향기가 났다. 언젠가 한승준 그가 언젠가 웃으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자의 정액에서 밤꽃 향기가 난다는 걸 아니?"
"그래, 몰랐네."
승준씨..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을 나지막히 불렀다.
"영인씨....."
일어서던 그가 뭔가 곤란한 듯 나를 보며 말했다.
"네..."
힘없이 나도 일어나 앉으며 대답했다. 이미 나는 모든 걸 각오
한 뒤였다.
"피가, 여기..이렇게..."
이불을 들추고 보니 피가 흥건히 시트를 물들이고 있었다. 이건
뭘까?
"생리 할 때가 가까웠나요?"
그는 아는 척 해왔다.
"네.그런가봐요."
당황해 하는 그를 뒤로 하고 나는 옷을 주워 가지고 욕실로 들어
섰다. 무슨 일이지. 생리때도 아닌데? 혹시? 혹시..이모의 병원
에서 그 여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설마,,,
정말 다시는, 여관의 그 불결한 정사를 벌이지 않겠다고, 깨끗하
고 온전한 사랑을 나누는 날까지 절대로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
겠다고 다짐했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미쳤던 거야...샤워를 하
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옥에 가도 할 말 없지..나은이에
게도 나는 이제 떳떳하지 못한 엄마야....비누칠을 하면서도 그
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다시 찬바람 이는 거리로 나는 ?겨 나
는 거야. 그래도 나를 사랑해준 그에게 최소한의 보답은 되었을
까.
"괜찮아요?"
욕실에서 나온 내게 그는 물었다.
"괜찮아요,,잘 들어요. 그 동안 날 잘 대해주고, 아껴 줬던 거
고마워요. 이제 다 잊어요. 하루밤 잘 즐겼다고 생각해요. 그리
고 이 문을 나서면서 다 잊어 버려요. 나도 그럴 거예요. 신애에
게 화냥년이란 소리 듣지 않게 해 줘요."
"영인씨..."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떨구었다.
거리를 나섰다. 으슬으슬 떨려 왔다. 혹시 나은이가 깨어서 울
고 있는 건 아닐까....이러고도 내가 에미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속에는 나도 모르는 화냥끼가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팔짱
을 낀 채 떨며 골목을 돌아서자 대문 앞에 신애가 기다리고 있
는 게 보였다. 당황한 나는 뒷걸음질 치고 싶었다.
"언니, 어딜 갔다 오는거야? 애는 혼자 잠들어 있고,"
"어, 잠깐, 볼일이...그런데 넌 언제 왔니?"
"한 시간 전 쯤에..누군가 또 찾아 왔어?"
"응?, 아니..아니야...들어 가자, 언니는 오셨어?"
"아니, 혁진씨랑 같이 가볼까해..."
"어, 그래 그래야겠지..."
따라 들어오려는 신애를 어쩌지 못하고 나는 방으로 들어섰다.
"언니!"
"어? 왜?"
"언니 바지가 왜 그래?"
"어? 왜?"
"언니 생리해?"
"어? 어, 어머,,그러네. 벌써."
급하게 화장실로 나는 몸을 숨겼다. 무슨 일이지. 아직 아닌데
혹시?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죽을수 없는데,,갑자기 죽
음에의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언제나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도 했었고, 죽으려고도 했었지만 죽음이 내 바로 코앞에 있는 것
처럼 여겨지자 나는 당황하며, 혈흔을 닦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