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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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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김혁진"


BY 로미 2000-09-23


16. 그 남자, 김혁진

"혁진 씨 이제 그만 돌아가야 되지 않겠어요? 신애는 너무 늦네

요 아마 오늘은 못 돌아 오나봐요."

저녁까지 먹고 천연덕스레 놀고 있는 그가 거슬려 나는 타이르

듯 말을 건넸다.

"삼촌 가야돼? 그런데 엄마 이거 맞추기 다 안 끝났잖아, 삼촌

이거 다 맞춰 주고 가면 안돼?"

"너무 늦었잖아, 삼촌도 가서 쉬셔야돼."

"오늘 수업도 없고 저 한가합니다. 조금 더 기다려 보다 가죠

뭐."

신애를 기다리고 있다는 데야 쫓아 낼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그

에게서는 신애를 기다리는 초조함이 보이지 않았다. 신애가 그렇

게 완강하게 반대하는 엄마에게 가서, 고집을 굽히지 않고 있을

엄마 때문에 울고 있을 이 시간에, 그는 태평하게 앉아 다른 여

자의 아이와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다...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내게는 지금 그와 불장난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따뜻하고 고맙다고 해서 기대고 싶을 만

큼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럴 수 없는 상대였다. 또한 사랑하는

여자가 그토록 힘들여 자기를 받아 들이려 하고 있는데 저렇게

한 눈을 팔다니. 나는 사랑이란 게 정말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혁진씨, 나 좀 봐요."

결국은 퍼즐을 맞추다 잠에 빠진 나은이를 눕히고 나서 나는 그

를 불러내었다. 내 속에 있던 화가 모두 그에게 몰리게 될까봐

숨고르기를 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말해 봐요."

"무슨 말씀이세요? 누나?"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 벤치 끝에 걸터앉으며 나는 그에게 물

었다.

"신애를 기다리러 온 거 아니죠?"

"누나,,,"

"내가 잘 못 생각한 거라고 말해봐요. 내가, 주책인 거라고 말해

요! 신애가 무엇 때문에 힘 들어 하는 지 잘 알면서 내가 그럴

리가 있냐고 혼자 사는 과부 주제에 무슨 엉뚱한 상상을 하냐고

말해 보란 말 이예요! 신애를 사랑한다고 말해요! 말하라 구요!"

그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게 더 화가 나서

나 혼자 미친년처럼 악을 써댔다. 그는 담배를 꺼내 조용히 입

에 물고 불을 붙였다. 불이 켜질 때 언뜻 보이는 그의 쓸쓸한 표

정을 보고 나는 일어섰다. 저 표정에 마음 약해지면 안된다, 그

런 생각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게 했다. 그리고,그에게 선고

문을 낭독하는 것처럼 말했다.

"나를 더 이상 우습게 만들지 말아요. 더 이상 망가지면 나는 살

아 갈 수 없어요. 그나마 이세상에서 내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지푸라기 예요..신애네 모녀는. 나를 가엾게 생각했다면 이제 그

만 접어 줘요. 부탁해요."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내 발자국 소리가 뚜벅뚜벅 하고

심장에 찍히는 거 같았다. 그래 이제 알아들었겠지...그러나 먼

지를 일으키며 달려 와 나를 잡아채는 그의 발소리에 곧 내 발

자국 소리는 묻혀졌다.

"왜 이래요?"

"사랑합니다..."

"안돼요!"

"안 된다고 해서 사랑이 멈춰지는 건,,,아니잖아요."

"난 아니 예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지푸라기 대신,,동아줄을 잡아요,,,네? 영인씨에게 튼튼한 동아

줄이 되어 줄께요. 나은이에게도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어요. 제

발 저한테 가라고 말하지 말아요."

"아니요, 아니예요, 혁진씨는 내게 튼튼한 동아줄이 될 수 없어

요. 알잖아요? 신애가 아니더라도, 나를 또 한 번 죽이는 거 밖

에 안돼요. 그래요, 생각해봐요, 혁진씨 부모님, 만약에 애 딸

린 과부한테 아들이 정신 나갔다고 한다면 어떠실 거 같아요? 아

니, 그것도 아니고, 난 아직도 나은이 아빠를 사랑해요, 정말 이

예요. 그러니 제발 놔 줘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비오던 그 날 밤부터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 선연한 아름다움, 나는 당신을 다시 못 만날까 너무나 조바

심 쳤지요. 신애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건 아니 예요. 신애와 나

는 오랜 세월을 친구처럼 의지한 사이지요. 하지만 영인씨를 처

음 봤을 때 내 심장을 찔러 오던 그런 느낌은 아니 예요. 내 생

에 정말 처음 이었어요, 그런 느낌은. 당신이 공교롭게도 신애

와 아는 사이라니...나도 무진 애를 썼지요 당신을 지우려고요.

당신이 아파 신음하며 밤새 헛소리를 해 대던 그 밤에 나는 한

숨도 자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제 당신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지

요. 나 아니면 누가 당신을 지켜 주겠어요. 신애는 내가 아니더

라도 잘 살아 갈 수 있겠지만 당신한테는 내가 필요해요...나에

게 기대어 쉬어요..제발, 제발..."

"나를, 안쓰럽게 바라봐 주고 동정해 주는 거 고마워요. 정말 오

래 잊지 않을 게요. 하지만, 안돼요. 제발 나를 아낀다면 나를

그냥 내 버려 둬요. 그게 우리를 도와주는 거예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의 눈을 보았다. 눈물이 어리는 고통스런 눈동자를 보았다. 가

면 안 되는 길을 가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 슬픔을 껴안은 채

멈춰 서지 못해 울고 있는 한 영혼을 나는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