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 남자의 아내.
"도와주세요..."
그녀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결혼식 날에도 보았지만 그녀는 아
주 충분한 사랑과 풍부한 재력, 교양이 넘치는 집에서 제대로
잘 자란 아름다운 여자였다. 나에 대해서 결코 고울 리 없는 시
선을 내색하지 않고 남편을 위해서 나에게, 진심을 다해 부탁하
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들었
다. 엉뚱하게 나는 마치 시앗을 본 큰마누라와 같은 심정이었
다. 어느 시골 촌 아낙이 어느 날, 남편이 데리고 온 서울의 세
련된 멋쟁이 첩을 보고 기가 죽는 옛날 소설을 떠올리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그런 감정은 그녀가 들어야 하
는 거 아닐까. 법적으로 그녀는 그의 아내였다. 나의 그런 황당
하고 근거 없는 생각은 정말 나를 더욱 초라하게만 했다.
"이런 부탁 드리는 거, 너무 죄송하다는 거 알아요...그리고, 저
도 힘이 들었어요."
"....."
"결혼 식 날, 저를 보러 왔던 영인씨를 보았지요. 참 이상한 기
분이었어요. 시댁 친척 분 중 한 분 일 꺼 라고 생각했지만 나중
에 비디오 테잎을 돌려보고 직감으로 알았지요. 승준씨의 표정,
어머니의 표정, 그리고 영인씨의 그 쓸쓸한 표정들,,,그런데,
왜 오셨던 건지 제게 알려 주실 수 있어요?"
"그냥, 서울 갈 일이 있었어요,,,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
고 싶었어요. 하지만, 추호도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 예요.
단지, 그냥 그 사람이 결혼한다는 걸 알고 축하해주고 싶었어
요..그것뿐 이예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 나는 쩔쩔매며 나 자신을 방어하기
에 급급했다.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저로서는. 승준씨가 영인씨의 축
하를 받고 싶어 할거라고 생각하셨어요? 힘들어 할거라고는 생각
지 않으셨나요? "
"글쎄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요? 꼭 비난받아야 할 일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리고,
네, 솔직히 그토록 끔찍이 반대하시던 어머니가 기쁘게 맞아
들이는 며느리는 어떤 사람일까 내심 궁금하기도 했겠죠. 아마,
그랬을 꺼 예요."
"신혼인데 한동안, 저는 참 힘이 들었어요. 승준씨에게 사랑하
던 사람이 있었다는 거, 물론,그럴 수도 있지요. 절 만나기 전이
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가슴 한켠 그렇게 남아 있는 사랑이 있다
는 것이 나를 못 견디게 했지요. 승준 씨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
지만, 어느 날 책갈피에서 발견한 사진 속에서도, 멍하니 다른
생각에 잠긴 뒷모습에서도, 저는 정말 힘이 들었어요. 하지만 지
나간 일을 붙들고 씨름할 만큼 전 어리석지는 않아요. 나와의 결
혼생활이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낄 만큼 잘 할 자신도 있었어요.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제 자신에게 너무 자만했던 게 아닐까 그
런 후회도 들어요. 아무튼, 남편은 최선을 다해 저에게 잘 해 줬
어요. 남편으로서 그런 사람도 없을 만큼 충실했다고 생각해요.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 남아, 너무나 감사하다고 저는 생각했었
지요. "
그녀는 목이 타는 듯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남편,,,그녀가 당
당하게 부르는 남편이라는 승준의 또 다른 이름, 내가 끝내 불러
볼 수 없었던 이름...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그녀의 얘기
를 들었다.
"하지만, 깨어나서 제일 먼저 한 말은 누구시냐고 묻는 거였어
요. 그리고 영인이를 좀 불러 달라고요...제 기분이 어땠는지 혹
시 짐작이 가세요? 그 사람의 시간은, 지금, 영인씨와 함께 했
던 그 속에 머물고 있어요. 깨어나려면, 영인씨의 도움이 필요하
대요... 그리고 전 알았어요. 그럼에도 저는 남편을 사랑한다는
걸요. 남편은 단지, 영인씨에게 가슴아프게 했던 지난날이 너무
사무쳐, 기억 저 쪽에서 그 시절을 보상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고 ,,,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시댁에서 함께 살고 계신다
는 말을 듣고 많이 망설였지만, 영인씨 아니면 안된다면, 발 밑
에 엎드려 절이라도 해서 모셔가야만 하는 걸요. 지금 중요한
건 남편이 갇혀 있는 추억 속에서 깨어나게 하는 거예요. 영인씨
에게 이런 부탁이 짐스러우시더라도, 제발 이해하고 도와주세
요."
긴긴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신을 원망했다. 살
아오면서 신에게 어떤 도움도 원망도 한 기억이 없지만, 이제 나
는 신이 너무 야속하다고 생각했다. 전생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은 걸까.
"아이 때문에 그럴 수도 없어요. 돌봐 줄 사람이 없거든요. 하지
만 하루 정도 시간을 내 보죠. 저를 보면 더 충격을 받지 않을까
요. 지금의 상태를 설명해 주지 그러셨어요."
"믿지 않아요. 승준씨는. 결혼사진을 보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
어요. 매일 영인씨를 불러다 달라고, 어머니께 사정하고 있어
요."
"알았어요. 그래요, 알았어요."
그녀 뒤로 벽시계가 눈에 띄었다. 나은이가 돌아 올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은이가 돌아오기 전에 그녀를 돌려보내려
고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약속을 하고 일어섰다.
"엄마~ "
그녀를 배웅하러 대문을 나서자 나은이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나는 흠칫 놀라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나은이가 달려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나은이 지금 오니?"
"안녕?"
"안녕하세요? 엄마 이 아줌마 누구야?"
"응, 엄마 친구,,, 그럼 안녕히 가세요."
나는 서투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엄마를 많이 닮았군요, 나은이는."
깊은 눈으로 나은이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이 수상스러워 나는
서둘러 이별을 재촉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곧 연락 주시면 감사하게 생각할게요."
"네 그러지요..나은아 아줌마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드려야
지."
"아줌마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기사가 대기하고 있던 골목 어귀로 사라졌다. 나는 사라
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엄마!"
"왜애?"
"저렇게 큰 차, 우혁이네도 있다..."
"그래...부러워?"
"응 나도 우혁이처럼 저런 차 타고 놀러 가고 싶어, 엄마."
"그래, 나중에 엄마가 돈 많이 벌어서 저런 차 사서 태워줄게."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다정하게 하십니까?"
그녀가 사라진 골목길을 바통이라도 이어 받은 듯 김혁진 그가
웃으며 큰 소리로 우리를 향해 소리 쳤다.
"삼촌!"
나은이는 펄쩍 뛰어 그에게 안겼다.
"혁진씨 웬일 이예요? 신애는 오늘 언니 모시러 이모댁에 갔는
데, 모르셨어요?"
"아뇨,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일 이예요?"
"나은이랑 누나 보러 왔지요."
"네?"
나는 사랑을 안다. 사랑 때문에 오랜 세월을 행복했고 불행하기
도 했던 사람이었다. 사랑이 어떻게 오고 가는지...나는 잘 알
고 있었다. 설마 하고 의심했던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의 심장에 새로이 솟아오르고 있는 사랑을 나는 느낄 수 있었
다. 그러나 나는 아는 체 할 수 없었다. 다시는 다른 사랑에 빠
지지도 않을 작정이었고,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지
도 내 자신이 다치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
는 내게, 사랑을 갖게 되었을까. 신애를 두고,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나는 난감해졌다. 그는 아직 모를 것이다. 그의 사랑으
로 인해 내가 당할 수모와 상처의 크기가 어떤 것인지를. 나는
그를 냉정하게 돌려 세워야 한다는 걸 알았다, 신애가 알아차리
기 전에, 그가 더 이상 내게 다가오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