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폭풍 속으로 (3)
"엄마 일루와. 내가 안아 줄게."
"나은이가 엄마 안아 줄 꺼야?"
"그럼 일루와, 엄마 아프니깐 내가 안아줄게."
딸아이는 그 작은 팔을 둘러 나를 안아 주었다. 나는 딸애의 얼
굴에 뺨을 비비면서 말했다.
"나은이가 안아 주니까 엄마 행복하다."
"엄마,이다음에 내가 크면 엄마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엄
마 좋아하는 호떡도 많이 사주고 자동차도 새로 사주고, 음 아무
튼 많이 사줄게."
진지한 얼굴로 내게 부도수표를 남발하고 있는 딸이 사랑스러워
나는 품에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 엄마는 너무 행복한 할머니가 될꺼야."
"엄마두 할머니가 돼?"
"그럼, 나은이가 엄마가 되면 엄마는 할머니가 되지..."
"에이, 엄마가 할머니 되는 건 싫은데..."
나은이는 엄마가 되고 싶지만 할머니가 될 수밖에 없는 엄마는
싫다고 고민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나는 딸아이
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흔들리는 나를 잡아 세웠다.
-나은이를 위해서 나는 지치면 안돼. 누구한테도 내어줄 수 없
어, 우리 나은이는...
가게도 정리 된 상태이니. 신애네와 헤어지는 건 너무 싫지만 이
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는, 나은이가 죽거나 내가
죽는 날이 오더라도 다시는, 그를 찾아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
다.
띠리리링....
전화벨이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내게 전화를 걸
어 올 사람, 누가 있을까.
"네, 여보세요..."
"응 나 윤형이...소식 듣고서. 니가 걱정이 돼서."
"어떻게 아셨어요."
"너도 알고 있었어?"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이모 소식 듣고 전화하신거 아니 예요?"
"이모님? 이모님이 왜?"
"아니 예요? 그럼 무슨 말 이예요?"
"무슨 말이라니..넌 그럼 모르는 일이라는 거지?"
"어휴, 무슨 말인지 천천히 해 봐요."
"놀라지 마,승준이가 다쳤단다. 아주 많이..그런데 말이다, 기억
을 잃었는데,,,너만 찾는 다는 구나.."
"이게,,,무슨 말 이예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승준씨가 다쳤다고? 기억을 잃었다고?
그런데 나만 찾는다고?
나는 아득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난 모르는 일이예요. 그런데,,,많이 다쳤어요?"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이었다는데, 앞차를 받았대. 다리 팔 가
슴 뭐 다 부러지고 다쳤는데, 중요한 건 머리야. 그래도 다른
건 다 괜찮은데,,,기억을 잃고 깨어나서 바로 너만 찾는다는 구
나,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 은정씨가 날 찾아 왔었
어. 너를 좀 만나고 싶다고,,,"
"말,,말도 안돼...그럴 수가..."
나는 수화기를 놓았다. 폭풍이 한꺼번에 내게 몰아 닥쳐 나를 휩
쓸고 지나가는 거 같았다. 거대한 해일이 밀고 들어왔다 모든
걸 쓸고 지난 자리처럼,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완전히 초토
화 된 대지 같은 심정이었다. 더 이상 놀랄 일이 내게 남아 있다
면 신은 참 잔인한 존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시련이 오
면 강해지기도 하는 게 사람이 아닐까. 태풍의 핵은 오히려 고요
한 것처럼, 내 머리 속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고 명료해 지
기 시작했다. 나는 망설이다 전화를 했다.
"선배 나예요..."
손이 떨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수화기를 쥔 채 말했다.
"그 여자 전화 번호 알려줘요..."
"왜? 만나 보려고?"
"아니요, 날 찾지 말라고 하려고요."
"니가 좀 도와 주면 안되겠니?"
"나를 보면, 기억이 돌아온다고 누가 그래요? 자신이 알아서 빠
져 나와야 할 꺼예요. 그리고 지금 난 누굴 도울 처지가 못돼
요."
"어머니가, 승준이 어머니가 너를 찾아 가실지도 몰라, 차라리
니가 올라와 보는 게 어떠니?"
"날 전혀 보고 싶어하시지 않을 텐데요..."
나는 미움을 들어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의사가 널 만나게 해 보는 게 도움이 될 꺼 라고 그랬나보더
라. 너한테 연락 좀 해 달라고,,어머니도...부탁하시더라."
"자기 아들이라면 정말 끔찍한 사람이군요. 저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처지라고 전해주세요.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
어요. 미안하다고 전해 줘요."
전화를 끊고 돌아서자, 나은이가 나를 가만히 쳐다 봤다. 나는
흠칫 놀랐다. 근심스러울 때의 그의 표정이 거기 있었다.
"엄마, 왜 그래?"
"아니, 아무 것도 아니 야."
"엄마, 그런데 어제 밤에 나 아빠 꿈 꿨다."
"아빠?"
"응, 저번에 만났던 왕자님 같은 아저씨 있잖아, 서울 가서 결혼
식 하는 거 보던 날 만난 아저씨,,, 그 아저씨처럼 잘 생긴 사람
이 아빠였어."
"뭐라고?"
"그런데 아빠가 나보고 나은아, 나은아, 보고 싶다...그랬어."
"그래, 아빠도 나은이가 보고 싶으실 꺼야...."
아,,나는 가슴을 쥐어뜯고 싶었다. 잠든 딸아이 곁에서 소주병
을 그대로 들이키며, 나는 입에 수건을 물고 꺽꺽 숨 넘어가는
소리로 울음을 토해냈다. 어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실컷
울고 싶었다.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엉엉 소리내어, 하늘과 땅
이 모두 울리도록 울고 싶었다.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