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폭풍 속으로(2)
"나은이 유치원에서 올 시간 다 되가는 데 좀 가봐 줄래?"
"그래 언니...혼자 할 수 있겠어?"
"그럼 이제 괜찮아."
"엄마가 이럴 때 계시면 얼마나 좋아, 혁진씨하고 헤어지겠다고
하지 않으면 돌아오시지 않겠다고 이모 댁에서 꼼짝도 안하고 계
셔..."
"너도 속 많이 상할텐데, 나까지 너무 미안해."
"아냐 언니. 그런 소리하지 마."
"그럼 나 이거 만 다 맞고 퇴원 수속하고 집에 갈게. 나은이 좀
부탁해."
"응 언니 그럼 이거 다 들어가거든 간호사 불러.."
링거 병에서 약이 내려오는 속도를 천천히 늦춰 주고 나서 신애
는 돌아갔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누워있었다. 햇살이 눈
부신 날이었다. 이제, 다시 무얼 하며 살아갈까 그런 생각이 들
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 씩씩하게 살아야지....그래
야 할텐데...나는 전의를 상실한 병사처럼 그렇게 맥을 놓고 있
었다.
"어, 혼자 시네요?"
작은 종이 봉투를 한 손에 든 채 혁진은 웃으며 들어왔다.
"어서와요. 신애는 나은이 때문에 집에 먼저 갔어요. 저도 오늘
퇴원해요. 이렇게 오셨는데 신애도 없고, 집으로 가 보세요."
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누님 보러 왔는 걸요."
"누님이요?"
나는 풋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러세요?"
"내가 너무 늙은 거 같아서요..누님 이러니까.."
"그럼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네, 그럼요. 저하고 몇 살 차이예요? 전 서른인데요."
"저, 스물 여덟인데요."
"아 그렇구나, 학교가 많이 늦으셨네요."
"가난한 집 장남이다 보니 일하랴, 공부하랴 늦었죠 많이. 아직
도 학생이니..참, 이거 드세요 누나. 초밥 좋아 하세요?"
"초밥이요? 웬 초밥이예요?"
"오다 샀어요. 잘 먹어야 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저 때문에 일부러 사 온 거예요? 정말? 너무 고맙군요. 신애가
왜 혁진씨 좋아하는 지 알겠어요. 너무 자상하네요. 그런데 지
금 일할 시간 아니예요?"
"출장중이거든요..시내 출장..같이 먹으려고 신애 꺼 까지 넉넉
히 사왔는데. 둘이 다 먹어요 그럼."
"전 병원에서 주는 밥 있잖아요. 점심 먹고 퇴원하래요. 이거 가
지고 집에 가셔서 신애랑 드세요."
"혼자 퇴원 수속을 하셔야 하는 거예요?"
"혼자 잘 할 수 있어요. 내가 뭐 중환잔가요?"
"제가 도와 드리고 갈께요."
"아니 ,아니 예요."
나는 펄쩍 뛰다 시피 했다.
"그 동안에 진 신세도 어떻게 다 갚나 싶은데, 됐어요, 혼자 할
게요. 결혼할 때 아주 큰 걸로 선물해야되겠네. 그렇죠?"
"누나,,,"
그는 농담처럼 하는 내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왜요?"
"언제 저하고 차 한잔하실 수 있어요?"
"그래요, 신애도 같이 가요. 제가 아주 근사한 저녁을 살 게요."
"아니요, 누나랑 단 둘이 서 만이요."
"저랑 둘이서 만이요?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어요?"
"네, 신애 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그리고 누나 핸드폰 번호
알려 줘요. 이건 제 명함이고요."
"그러죠, 알았어요. 혁진씨, 기운 내요.."
나는 그가 신애 엄마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했
다. 나 역시 같은 아픔을 당한 적이 있어서 인지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본인의 문제가 아닌 환경의 문제로 다른 사람에게 배척
당한 다는 것, 그 완강한 벽 앞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무기
력한 슬픔을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남자라고 해서 그 아픔이
덜 하지는 않으리라...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그는 가지
않고 남아 수속을 마쳐주고 나에게 택시를 태워 주었다.
"가서 신애 에게 아무 말 말아 주세요."
"왔다 갔다는 것 도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꼭 그렇게 할 것까지야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어쨌든 그러
기로 했다.
집에 돌아온 나를 발견하자 나은이는 공처럼 튀어 올랐다.
"엄마야, 엄마, 우리 엄마!"
"그렇게 좋아?"
"응, 엄마 아프지 마?"
"그래 안 아플 게 약속!"
"아이고 눈물나서 못 보겠네. 언니 수속은 혼자 힘들지 않았어?"
"으응."
왠지 거짓말을 한다는 게 조금 걸렸지만 신애에게 나쁜 뜻이 있
었던 것은 아니므로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슬쩍 넘어갔다.
"그럼 난 이제 학교 가 봐야 겠다."
"그래 신애야, 정말 고마워."
"으이그, 고맙단 소리 정말 지겹다, 그만해!"
그녀는 나를 슬쩍 흘기며 말했다. 그녀의 진심이 너무 따뜻했
다. 나는 훈훈한 담요를 두른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참 언니, 친구라는 사람이 전화했더라. 언니 핸드폰 번호를 묻
던데, 전화 안 왔었어?"
"친구?"
"응, 누구 라더라...신 뭐라던데..."
친구라니..내게? 혹시, 설마 하면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날이 잘 선 칼에 손을 베인 것처럼 섬뜩한 느낌이 지나갔다.
"혹시...은정이라고 안 그러던?"
"아, 맞다 은정씨! 신 은정 이라고 그러던데?"
나는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그 여자 이름만으로도 질릴 만큼 나
는 약해져 있었던 걸까?
"신은정이 누군데 언니? 내가 잘 못 가르쳐 준거야? 친구라 길
래...언니 입원했다고 가르쳐 주었는데, 언니, 왜 그래?"
"아니야,,괜찮아,,,어서 가봐."
그 여자가 왜? 이제 와서 무엇 때문에? 혹시 나은이에 대해서
알아 버린 걸까? 팽팽한 긴장이 오히려 내게 자리를 떨치고 일어
날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