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폭풍 속으로(1)
어딘가 알지 못하는 길을 엄마 아빠와 달려가고 있었다. 내 손
에 들려진 작은 인형을 옆자리에 떨어뜨린 채 잠이 들었던 나,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고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영인아,
영인아, 아가야, 아,,가...야.. 엄마? 엄마 어디 갔지? 엄마랑
아빠는 어디 갔지? 나만 남겨 놓고? 나도 데려가요!! 영인아...
아빠? 아니 이모부야,,,아니 웬일이세요? 잠들었었니? 네... 비
오는데 문이 열려 있길래.. 왜 그러세요? 이모부 왜 그러세요?
징그러운 뱀처럼 내 몸에 감기던 이모부의 혀,,,악! 살려 주세
요...살려 주세요...잘못했어요...살려 줘요...영인아~ 꿈 결처
럼 들리는 그의 목소리. 승준씨? 응....왜 이제 왔어..나 너무
힘이 들었어. 영인아 이제 괜찮아, 내가 있잖아,,,언제나 너를
사랑 할께...사랑해...안 된다. 저런 아이를, 절대로 안돼! 아
제발 승준씨 데려가지 마세요, 아니 아니야, 나은이잖아,,안돼
요 나은이는 안돼요, 내 아이를 절대로 빼앗길 수 없어요, 나를
죽여요, 나를!!! 이거 꿈이지? 꿈이지!!! 나를 깨워줘요! 승
준씨 나를 깨워줘요! 나은이를 지켜줘요, 이모 이모!!! 용서해
요, 다 용서해요, 나은이를 내게서 지켜줘요! 제발,제발!
"엄마.."
눈을 떴다. 여기는 어디일까? 희미한 병원냄새가 난다. 어디지?
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곳 같아,,,정신병원? 뭐라고 정신병
원? 나는 벌떡 일어났다.
"무리하시면 안돼요. 밤새 신음소리를 내며 앓으셨어요."
몽롱한 채로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나은이와 낯선 남자가 눈
에 들어왔다.
"누구세요?"
등쪽에서 흐르던 땀 때문에 옷이 축축해서인지 갑자기 한기가 느
껴졌다. 이불을 당겨 덮으며 나는 멍하니 물었다.
"저 기억 못하세요? 김혁진입니다. 신애랑 사귀는...그리고 저번
에 휴게소에서 만났던,,,기억하세요?"
"아, 네,,,그런데...어떻게 된 일이지요?"
"엄마 인제 안 아파?"
"어, 안 아파,,나은이는 언제 여기 왔어?"
기운을 추스르려고 애쓰며 나는 물었다.
"어제 엄마랑 왔다가 신애 언니랑 가서 자고 아침에 다시 왔어.
신애 언니 뭐 사러 갔어."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예..그게..."
청년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다 봤다. 언제 봐도 여유 있고 미
소가 싱그러운 청년이었다.
"언니 깨어났네?"
때마침 들어온 신애는 주스병을 든 채 내 안색을 살폈다.
"신애야, 어떻게 된거야?"
"기억이 안나요?"
"응,,무슨 일이지..."
"집에 온 건?"
"집에 온 거야 알지. 내 말은 내가 언제 이리로 왔냐는 거야, 어
떻게?"
"언니, 딸 무지하게 효녀더라."
"나은이?"
"응, 나은아 엄마 일어나셨으니 이제 삼촌이랑 아침 먹으러 갔
다 올래?"
"그래 아저씨도 아침 못 먹었다. 같이 가자."
나은이는 나를 근심스레 바라다보고 있었다.
"아침도 못 먹었어, 우리 나은이?"
"엄마 괜찮아?"
"어, 괜찮아 이제...가서 아저씨랑 아침 먹고 올래? 나은이가 아
침 먹고 와야 엄마가 기운이 나지.나은이 밥 안먹으면 엄마도
기운 없는 거 알지?"
"응, 이제 엄마 괜찮으니까 나 아침 먹고 올게."
"그래 우리 공주님! 삼촌이랑 가자!"
그는 나은이를 번쩍 안아 들고 병실을 나섰다.
"정말 고마워요."
그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지만 그 웃음 끝에 묻어나는 안스러움
에 나는 당황했다.
"혁진씨가 언니를 업고 왔다. 나도 안 업혀 봤는데.. 호호호. 웃
긴다 이런 말하니까. 참 나도 주책이야. 이런 말 할 때가 아니
지..어제 밤에 우리 작은 이모 댁에 일이 있어서 엄마랑 나랑 갔
었잖아. 난 언니가 고단해서 나은이랑 일찍 잠이 든 줄 알았는
데 밤새 열이 너무 높았나봐. 언니가 막 헛소리하고 끙끙 앓으니
까 나은이가 우리 집에 뛰어 왔던 모양인데 누가 있었어야지. 마
침 혁진씨가 왔었던 모양이야. 참 다행이지. 지나다가 잠시 들렸
었다는 데. 나은이가 우리 집 현관문을 마구 두드리면서 엄마가
죽는다고 소리소리 질렀대. 혁진씨가 뛰어들어가서 업어다 여기
루 날랐어. 언니 너무 힘들었었나봐. 다 낫거든 한턱 단단히 내
야 돼! 알았지?"
"그랬구나..정말 미안해서 어쩌니..."
"그나 저나 이제 좀 괜찮아?"
"어, 괜찮아야지...."
나는 앉아 있기가 힘들어 누웠다.
밤새 헛소리를 해대며 앓을동안 어린 내 딸은 얼마나 놀랐을까.
어린 것이 그 작은 손으로 엄마를 살려달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니. 가슴이 아려왔다. 이모의 장례를 치루고 집에까지 어떻게 내
려 왔는지 별 기억이 없다. 눈을 감자 한숨이 나왔다. 나는 아
무 것도 준비해 둔 것 없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로
?겨 난 기분이었다. 나은이를 부여안고, 이 미친 듯 날뛰는 바
다 한 가운데서 살아 남으려고 애써야 하는 날들. 내게 남은 날
들은 그런 날들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살아 남아야 겠지.이렇
게 막막할 수가, 나은이를 혼자 나았을 때도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았었는데,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