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용서(1)
"사는 게 이게 무슨 꼬락서니냐?"
좁은 방안에 이불자락을 덮고 앉아 있던 이모는, 못마땅해 죽어
가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뭐 어때서요?"
"서울로 오라니까 꼭 이렇게 오만 궁상을 떨어가며 살아야 겠
니?"
"이모, 제발 이요, 그냥 내버려 둬줘요."
"나도 너 모른 척 내 버려 두고 싶다. 징그럽다 니네 모녀!"
"할머니? 이 인형 옷 좀 입혀 주세요."
옆에서 이모와 내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나은이는 이모가 사온
화려한 인형의 옷을 벗기고 제가 가지고 있던 남루한 옷으로 갈
아 입히는 중이었다.
"아니 왜 이걸 벗겨? 이게 더 이쁜데?"
"에이, 이거는 놀 때는 너무 불편한 옷이잖아요. 이걸로 갈아 입
히고 할머니 맛있는 밥 해드릴려고 그래요."
"에고 이 이쁜 것, 지 엄마보다 백 번은 더 낫다."
"참, 저녁 해 드릴께요."
"싫다 어디가서 맛있는 거 먹자."
"오늘 문 연데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호텔에 가면 열었겠지."
"이모!"
"너보고 돈 내라고 안 한다. 오늘 같은 날 이렇게 보내긴 정말
싫어."
결국, 시내를 뒤져서 문을 연 레스토랑을 찾아냈다. 마땅치 않기
는 나도 마찬가지여서 잔뜩 찌푸린 채 였다. 내일은 제발 서울
로 돌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투덜거리며 돌아왔다.
이모한테 노래도 불러주고 재롱을 떨던 나은이가 잠든 후 이모
는 와인을 홀짝이면서 TV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내가 잠자리에 들
려 하자 정색을 하고 불러 앉혔다.
"이게 뭐예요?"
이모는 통장을 내밀었다. 약간 취기가 오른 듯 보였다.
"이모부가 돌아가실 때 네 앞으로 남겨 둔 거다."
"됐어요 이모, 전 필요 없어요."
"왜? 넌 돈 좋아하잖아?"
"이모!"
"승준이 엄마한테서는 그런 돈도 받았으면서 이모부 돈은 싫다
는 건 무슨 경우냐?"
"이모가 그걸 어떻게?"
"승준이 엄마, 내가 안다는 건 너도 몰랐을꺼다. 아무리 잘난
척 독판해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야."
"이모, 아무튼 이모부께 전 미리 받은 것도 있어요. 가게 얻을
때 대 주셨어요. 이건 이모 쓰세요."
"받아 둬. 그리고 어차피 내가 죽으면 너 밖에 줄 사람도 없는
데 뭐."
"이모 안 돌아가실테니 걱정마세요."
"영인아..."
"이모, 건강 염려증 이라고 아세요? 안 돌아가세요 글쎄. 이모
같은 사람은 아주아주 오래 사실테니 걱정 붙들어 매 두시고 돈
아껴 쓰쎄요. 전 나중에 몰라요."
"영인아, 나 자궁암 수술 받는다. 올라가서."
"네?"
"벌써 말기에 가깝다더라."
"정말이예요? 농담이죠?"
"몹쓸 년, 농담할게 따로 있지. 아무튼 더 지지리 고생하고 난
후에 나중에 주려다 죽기 전에 미리 주는 거다 그런 줄이나 알
아. 그리고 나 죽은 후에 언니한테 원망 듣고 싶지 않다."
"이모, 언제 아셨어요? 왜 이제 말씀하세요?"
"내가 죽는다니 서럽기는 하냐?"
"이모!"
"수술 받으면 괜찮대요? 그죠? 괜찮대죠?"
나는 소리 높여 울어댔다. 드디어, 정말, 이 세상에 끈 떨어진
연처럼 나 혼자 나은이랑 달랑 남겨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망했
다. 모른 척 하고 살아도, 내 마지막 보루처럼 그렇게 이모는 존
재하는 것만으로도 내게 힘이 되었던 것이다.
"방정 떨지 마. 수술 받아 보면 알겠지. 그리고 남은 거 거의
다 처분했으니 내 수술하고 나면 간병인이나 붙여주고, 죽고 나
거든 집도 팔아서 처분해라. 그 집, 너한테는 징그러워도 난 아
주 소중한 곳이니."
이모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설마 이모...."
"난 니네 이모부, 용서했다."
"너도 이제 그만 용서를 해..."
"어떻게, 어떻게 아셨어요?"
이모는 천천히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영인아, 이렇게 된 건 사실 다 내 탓이야. 이모부, 네 아빠랑
친구였던 건 너도 알지? 사실은 말이다, 이모부는 니 엄마 애인
이었어. 내가 빼앗은 거야. 니네 이모부 아니면 죽겠다고 약도
먹었었다. 결국 승리했지. 항상 그랬어. 똑똑하고 잘난 니네 엄
마한테 난 번번히 뭐든 양보 받았었지. 언제나 나는 어리광만 부
리면 되는 거였어. 그런데 뭐든 다 양보 받아 가져도 항상 나는
더 더욱 배고픈 어린아이 같았지. 언니 죽었을 때, 너의 아빠
먼 먼 친척, 그래 그 나은이 호적상 엄마 아빠 말이야, 그 사람
들한테 널 보내려고 했었어. 니 이모부가 언제나 널 보면서 언니
를 생각할까봐 난 너무 두려웠어. 이모부는, 너를 정말 사랑했었
다. 딸처럼 말이야. 하지만 언제 부턴가 너를 통해 언니를 본다
는 걸 난 알았어.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하지만 이모 그래도 난 용서가 안돼요. 이
모는 남편이니까, 이모부를 사랑하니까 그런지 몰라도 난 쉽게
용서 할 수 없어요. 나도 이모부를 아빠처럼 사랑했으니까요."
"이모부가, 정말 너를 어떻게 하려고 끝까지 그랬다면, 니가 도
망치게 그냥 뒀겠니? 잠시 이성을 잃었어도, 울부짖는 널 보고
정신이 돌아 왔던 거야. 그러니까 니가 도망치도록 그렇게 내 버
려 둔 거지."
"이모 그건 말이 안돼요.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세요? 저도 힘들
어요, 모르겠어요. 좀 더 세월이 흐른다면,,,그럴 수 있을지도."
"나도 쉬웠던 건 아니야, 너처럼 정신 병원에 들어앉아 있고 싶
었다. 이모부도 죽는 날까지 후회하고 힘들어했어. 난 결국 모
든 게 다 내 탓이란 걸 알고 있었던 것 뿐이야. 언니에게서 사랑
을 빼앗고, 결국 사랑하는 남자를 그런 꼴을 만들게 했잖아. 그
리고 너를 이렇게 망치게 한 것도 나야."
"이모, 그러지 마세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터질 것처럼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이
럴 수가,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다니. 나는 이모가 아무 것도
모르는 인형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걸 싸안은 채 모
른 척 홀로 삭이고 있었다니.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고통스럽
게 혼자 힘들어했을 이모를 붙들고 나는 밤새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