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또 다른 인연의 끈
"알았지 언니?"
"별일 다 있구 마는...?졍?며느리가 다 생겨 쌌고,,,그런 다꼬
쉽게 물러 설 꺼 같나?"
"해보는 데까지 해야지...안 그럼 나은이랑 다시 떠나 버릴 수
밖에 없어."
"내 뭐라 카드나? 가지 말랬재. 니도 참 똥고집도 말도 몬한
다..."
"그럼 뭐야? 언니가 우리 엄마한테 어머니라고 하면 난 시누인
건가?"
나는 허둥대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서의 생활
을 정리하고 나은이 손을 잡고 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건 아
닌지. 이제 겨우 사는 것 같은데....정말 이민이라도 떠나야 하
는 건 아닐까...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미봉책이나마 신애네 모녀에게 털어놓고 만약을 대비해서 신신당
부를 해뒀다.
내 팔자가 이렇게 된 건 운명 때문이 아니라 나의 잘못된 판단
능력 때문일 꺼 라고 언제나 후회하고 또 하지만 언제나 혼자
결정 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심한 처지가 참으로 처량했다. 결
국 어설픈 나의 행동 때문에 이제 여기까지 잘 끌고 왔던 삶을
다시 망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가슴 졸이며 허깨비처럼 며칠을 보냈다. 그래도 별 일은 일어나
지 않은 채로 지나가 주었다. 가끔, 단골이 아닌 못 보던 젊은
여자가 가게로 들어서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곤 했지만 그녀가 나
타나진 않았다.
추석 대목이라도 경기가 예전 같지는 않아서 평소보다 조금 더
손님이 많은 정도였다. 내일은 나은이랑 어디 온천이라도 다녀와
야지, 가서 푹 쉬고 나은이를 놀이 동산에도 데려가 주고, 맛있
는 것도 사 먹이고..그런 계획을 머리에 그리면서도 명절이면
어쩔 수 없이 돌아오는 가슴속의 허함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애네 모녀도 명절이면 큰댁에 다니러 가고 집에는
항상 나와 나은이만 남겨졌었다. 나야 그렇다고 치고, 나은이가
언제나 명절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크는 게 가슴아팠다. 친척
들이 모이고 음식 준비로 부산스럽고 모두 모여 차례를 올리고
산소에 벌초 가고,,,나도 물론 잘 모르는 일들이었다. 이모네는
명절이면 이모부네 본가로 가 버리고 나는 홀로 남아 집을 봐야
했었다. 일하는 아줌마 마저도 그 날은 자기 집으로 가야 했으므
로 언제나 나는 명절 아침을 홀로 보내는 아이였다. 깜깜한 밤보
다도 텅 비어버린 집안에서 혼자 눈뜨는 아침이 더 무서웠었다.
내가 커서 결혼을 하면 아주 친척들이 많은 집으로 시집을 가서
송편을 빚고 음식 준비를 하고 차례를 올리고 모여 앉아 정담을
나누는 그런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런
내 어린 시절의 삶을 고스란히 내 딸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그래
서 더더구나 명절이 돌아오면 나은이가 절대 혼자 눈뜨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아이 옆에 있어 줬다. 나은이에게는 더 이상 엄마
의 삶을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은이가 결혼 할 나이가 되
면 나는 그 때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그 애가 좋은 짝을 만나
서 인정받는 안정된 결혼을 하는 걸 꼭 바라볼 것이다. 그게 내
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이고 장사는 장사대로 해야지,,저녁에는 또 음식 준비해야
지..아이 지겨워~~"
상가 안 여자들이 여기 저기서 이런 푸념을 늘어놓으며 나은이
엄마는 그래도 좋겠다고,,,악의 없이 내 가슴에 못을 쳐도, 마
저, 난 아무 것도 안 하니까 팔자 늘어졌지- 이러면서 받아 칠
정도는 되었다. 그러면서도 무심히 남의 가슴을 후벼파는 그 심
사는 뭘까 잠깐씩 생각해 보기도 했다. 아마, 나를 두고 그래도
우리가 더 나은 거야,,,,라고 위로 받고 싶은 걸까. 하긴 명절
이 노동절이라고 하는 푸념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늦은 밤까지
음식준비를 하고 손님을 맞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하며 지겨워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사심없이 아무 일도 안해도 되는 내가 부
러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꼭 한 번이라도
며느리라는 지위에서 인정받으며, 남편에게 갖은 생색을 내며
해 보고 싶은, 그런 일 일수도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진 않는 걸
까? 아마 알 것이다. 그들도.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는 처지가 부럽긴 하지만 그래도, 저 끈
떨어진 여자보다야 내가 낫지...그런 식으로 위안 받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를 주는 비교 대상이 된다는 거, 좋은 일이
기도 한 걸까? 내가 세상을 너무 예민하게만 받아들이는 건 아닐
까. 자격지심을 갖고 사람들을 보는 건 아닐까? 나는 고개를 흔
들었다. 이렇게 예민해지는 내가 싫었다. 이런 삶조차 내가 선택
한 건데...그렇게 꼬이면 안돼, 손영인....나는 내게 타일렀다.
시댁에 가기 전에 동서들이나 시누들 보기 그렇다며 뭐 새로운
걸 하나라도 사 입으러 오는 여자들 때문에 밤늦게 까지 문을 열
어 둬야 했다. 어차피 안 사고 갈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폭리
를 취할 수 있었고 그런 까닭에 주머니는 불룩해졌고 마음은
더 더욱 가난해졌다.
송편도 좀 사고 고기도 좀 사고, 나은이의 새 옷도 한 벌 사고,
작은 비닐 종이를 잔뜩 들고 집에 들어서자 나은이가 튕겨 나온
듯 나를 반겼다.
"우리 딸! 잘 놀았지?"
"응 엄마, 엄마 근데 이층에 신애언니 애인이 왔다!"
"신애 언니 애인?"
"응 엄마도 가봐!"
"아니, 아니야. 나은아 우리는 이제 우리 집에 가야지. 언니랑
아줌마랑 아저씨랑 얘기하는 거야."
"왜 애? 우리도 식구잖아?"
"응...그건 그렇지만..."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좀 난감해서 잠시 머뭇거리고 서 있
었다. 그 때 이층 현관문이 반쯤 열리며 신애가 얼굴만 내밀었
다.
"언니! 뭐해? 그 사람 왔다. 얼른 올라와!"
"아니야, 나까지 뭘. 너무 늦었는데...우린 그냥 들어갈게. 다음
에 보지 뭐."
"아이구, 언니 빨리 와서 좀 도와줘!"
한껏 목소리를 낮춘 신애는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였다. 그와
결국은 계속 사귀기로 마음 굳힌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움직이
기 전에 신애 뒤로 그 남자와 언니 모습이 보였다.
"어머님 그럼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조심해 가소 마."
언니는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애써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신애는 수습하려고 애 쓰고 있었다.
"아, 혁진씨 인사드려요. 우리 집에 같이 사는 언니예요. 나은
이 엄마요."
"아 그러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혁진입니다. 안녕하세
요?"
"예,,예 안녕하세요,,,나은이 엄마예요..."
나도 어색하게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나눴다.
"어?"
"어디서?"
"저 추풍령 휴게소? 그렇죠?"
"아 그러네요...그 때 잘 가셨어요?"
"아니 이렇게도 만나네요...정말 반갑습니다."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였어?"
"전에 휴게소에서 배터리 방전되는 바람에 꼼짝 못하게 되었을
때 도와준 사람 있었다고 했지. 그분이야."
"어머, 그게 언니였어?"
"응.."
"늦었는데 마 그만 갈 사람 가고 드갈 사람 드가고 그케야지 밤
샐라꼬 작정들 한기가?"
언니의 뾰족해진 심기가 더 도드라졌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네 ,,그럼..나은아 우리도 들어가자."
나한테까지 불똥이 튀어 올지 몰라 나는 나은이의 손을 잡고 집
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밤이 다 새도록 이층은 내내 잠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