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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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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놓은 덫


BY 로미 2000-09-08

7. 내가 놓은 덫

이모보다 먼저 윤형 선배가 나를 찾아 왔다. 내가 한 번 찾아오

라고 건넸던 명함을 들고 물어물어 왔다고 했다.

"여길 웬일이야?'

"응, 부산에서 세미나가 있는데 지나가다 널 보고 가려고."

"그래...."

"가게가 끝날 시간이 다 되지 않았어?"

"어. 그런데 아이가 기다리거든. 집에 전화해서 좀 더 시간이 걸

릴 거라고 말해 주지 뭐. 저녁식사는 했어요?"

"그럼 지금 몇 신데? 아이는 누가 봐줘?"

"네, 집에서 봐주지요.나는 아직 저녁 전인데 그럼, 오랜만에 저

녁 겸 맥주나 한잔할까?"

"난 운전해야 되는 데..늦게라도 오늘 부산에 도착해야 하거든."

"그렇구나...그럼 커피나 한잔하러 가요."

남자가 나와 나란히 나서는 걸보고 상가 사람들은 대번에 궁금

한 눈빛들이 되었다. 아마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릴 것이다. 시장

이라는 데는 그런 곳이니까. 전에는 가벼운 목례만 하고 지나던

사람들도 유난히 아는 척 인사를 건네 왔다.

혼자 사는 여자는 그런 거였다. 조금만 다정하게 낯선 남자와 얘

길 나눠도 바람이 났다더라,,그런 식으로 다음 날이면 소문이 번

지는, 살얼음 판을 걷는 것같이 항상 조심스러운 행동을 해야하

는 처지였다. 혹시 자기 남편이 눈길이라도 보낼까 경계의 대상

이 되기도 하는 한심스러운 처지가 바로 혼자 사는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선 따위를 신경쓰지 않았다. 나에게는 나은

이가 있었다. 그애가 있는데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 심정이었

다.


"정말 그대로구나..."

"그대로라니? 욕하는 거야?'

"아니 정말이야...."

그는 진심 어린 미소를 보냈다. 나는 마음이 따뜻하게 풀렸다.

한 때 이 사람도 나를 좋아했었던가. 언제나 내게 친절한 미소

를 보여 주고 보이지 않게 나를 도와주던 사람이 윤형 선배였

다. 그때는 왜 그걸 몰랐었지. 아니 아는 척 안 했던 거지. 다

른 사랑에 눈멀어 있었으니까.

"호텔은 요즘 어때요?'

"응, 맨 날 그렇지 뭐."

"이제 과장이 되었나? 형은?"

"응..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임부장님은?"

"다른 호텔로 옮기 셨잖아. 그렇지 않아도 널 궁금해 하셨는

데.."

"죄송하다고, 언제 뵙게 되면 말씀 드려야 하는 건데..."

"다 이해 하실꺼야."

"그래도 죄송하지 뭐. 나를 언제나 염려해 주셨는데."

윤형 선배와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자니 예전에 호텔에서

근무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이모 집에서 나온 후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란 건 죄다 해 가

며 몸이 부서지게 일 했었다. 막 생기기 시작한 편의점에서 밤

을 세우고 아침에는 독서실에서 잠시 눈을 붙여 가면서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나에게는 돌아가 쉴 한 칸 짜리 방이 필

요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못다 한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

나 경제적으로 어렵게 자란 것은 아니었던 나는 몇 달이 지나자

서서히 지쳐 가기 시작했었다. 갓 스무 살이 되었던 어린 내가

생각한 것처럼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돌아

갈 수는 없는 거였다.

그 무렵 우연처럼 아버지의 옛 친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

다. 갈비 집에서 쟁반을 나르며 식탁에서 열심히 고기를 자르고

있을 때였다. 나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엄마와 닮았다는 이유만

으로 나를 알아 봤다는 사실에 미심쩍어 했어야 했는데도, 이 세

상에 나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분에게

호감을 느꼈었다. 작지만 이름있는 호텔의 경리부장이었던 그 분

은 내게 호텔 커피숍의 캐셔 자리를 마련해 줬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될 수 있었던 나는 다시 세상을 만만하게 볼 자신이 생겼

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불행과 맞물리게 되리라고는 예상

치 못했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친구가 실은 이모부의 친구였

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난 후였다.

결국, 아버지와 이모부가 친구였으니, 아주 틀린 건 아니라고 나

를 애써 달래면서 나는 눌러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거리로

나가서 온갖 잡다한 일들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또한 내게는 버리지 못한 안정에의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윤형

선배는 영업부의 신입사원이었었고, 선배를 만나러 커피 숍에 왔

었던 한승준 그와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잘, 살죠?"

나는 아주 무심한 척 선배를 향해 물었다.

"응,,,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어."

"문제라니요?"

"결혼식때 니가 왔었잖아..."

"그런데요?"

"나중에 비디오필름을 돌려 본 은정씨, 그러니까 승준이 와이프

이름이 은정씨거든. 은정씨가 누구냐고 물었다는 거야."

"그래서요?"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 아차 싶었다. 비디오에 찍히고 있는 줄은

몰랐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우리 모녀

가 눈에 띄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승준이가 우물쭈물하니까 좀 수상하게 생각해서 어머님께도 여

쭤 본 모양인데 서로 말이 엇갈리니까 일이 좀 꼬인거 같더라.

그리고 승준이 예전 노트를 우연히 본 모양이야. 일부러 뒤졌든

어쨌든 간에 거기서 사진이 나왔단다."

"......"

"너하고 예전에, 봉천동에서 살 때, 그 집 옥상에서 우리들같이

찍은 사진 있잖아. 저녁 먹으면서 찍었던...그게 나왔던 모양이

라."

"설마 그게 우리들 집이었다고 생각하진 못할 꺼 아니에요?."

우리들 집...그 말이 가시처럼 목을 찔러왔다.

"은정씨 생각보다 예리하더군. 나를 찾아 왔더라. 아는 일이냐

고?"

"그래서요?"

"그냥 아는 내 후배였는데 조금 사귀다가 헤어졌다고 말해줬지.

그런데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똑바로 선배를 쳐다봤다.

"조용하지 않으면 어쩌겠대요? 난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불

행히 과부가 되었지만,혼자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고 전해 주세

요. 그리고 그 여자 남편한테 털끝만큼도 관심 없어 하더라고도

전해 줘요. 결혼식장에 간 건 뭐, 훼방이라도 놓으려고 간 건 아

니 었다고요, 이미 끝나 버린 사이인데, 그리고 6년이 넘은 일인

데 이제 와서 무슨 마음이 남아 있겠어요?"

나는 결혼식장에 간 걸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이었지만, 선배 앞

에 내색할 수는 없는 거였다.

나는 정말 미련하게 내가 어리석게 놓은 덫에 다시 걸려든 기분

이었다.

"니가 미리 좀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어쩌면 널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시댁식구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오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그러니?"

윤형 선배는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