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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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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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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


BY 로미 2000-09-01

5.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


대학 병원 입구에서부터 나은이는 겁을 내었다.

"엄마, 오늘도 잠들어야 해?"

"아니, 아니야. 오늘은 저 번에 나은이 여기..심장 사진 찍은

거 어떻게 나왔나, 보기만 하는 거야."

초음파를 찍을 때 하도 울고 불고 해서 결국 마취제를 먹었던

게 영 기분 나쁘게 기억되는 모양이었다.

"주사도 안 맞고?"

"글쎄,,,아마 그럴 꺼야. 선생님이 나은이가 아프지 않도록 해

주실 꺼야."

"나은이는 하나도 안 아픈데?"

"글세 말이야, 하지만 그냥 있으면 아프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

잖아? 미리 안 아프게 해야지."


예약된 차례를 기다리며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병원에 오면, 아픈 사람이 많은 게 당연하지만,소아심장과에 와

서 보니 왜 이렇게 심장병을 앓는 아이가 많은 건지.

그건 그렇다고 해도, 심장병이라면 입술이 파랗거나 손톱 밑이

보라색인 창백하고 핏기 없는 아이들만 떠올리던 나는 어느 날,

우리 나은이 에게 선천적으로 이상이 있는거 같다는 의사의 소견

에 망연자실 했었다.

유난히 감기를 잘 앓았지만 잘 뛰고 잘 노는 나은이 에게 그런

일이 일어 날 줄을 누가 알았을까. 감기가 잘 낫지 않아 새로 생

긴 잘 본다는 소아과에 진료 받으러 간 날, 의사는 한참이나 고

개를 갸우뚱하면서 나은이의 심장 근처에서 청진기를 떼지 못했

었다.

"왜요? 선생님? 폐렴인가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불안감을 떨치려고 이렇게 물었

었다.

"혹시요,전에 나은이 심장이 이상하다는 소리 듣지 못하셨나요?"

"심장이요? 아니요? 전혀요."

"심장 소리가 좀 이상하군요. 감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어떤데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심장에서 ?J히는 소리가 들리거든요?"

"심각할 수도 있는 건가요?"

"글쎄요.경우에 따라서는요. 일단 감기 치료 후에 한 번 데리고

나오세요. 그 때도 그렇게 들리면 제가 소견서 드릴 테니 종합

병원으로 가셔서 검사를 한 번 받아 보시지요."

"네.. 네에..."

나는 그 때 의사가 오진했거나, 아니면 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는 말에 희망을 가지려고 애썼썼다.


어째서 삶은 항상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걸까. 난 그래도 열심

히 살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데도. 아이가 불안 해 할 까봐 내색

없이 의연한 척 집으로 돌아와 그 날 밤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은이의 감기가 좀 나은 다음 다시 병원에

갔었다.

의사는 아무래도 이상이 있다고 말했다. 소견서를 받아 들고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길로 다른 동네 병원에 가 보았다. 거기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친김에 두 군데나 더 갔었지만 다른 데서는 아직 아이

가 감기가 다 낫지 않았다는 말뿐이었다. 조금 안심이 된 나는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그래 ,저렇게 잘 뛰어 노는 데, 뭐.

며칠을 그렇게 안깐힘 쓰며 버텼지만, 아무래도 걸려서 마음을

다잡아먹고 다시 병원에 찾아갔다. 의사는 내 안색을 살피더니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말라고 위로했

다.

-아니기만 해봐. 돌팔이라고 온 동네 소문을 내고 말 테니....


그렇지만,대학병원에서 심장 엑스레이와 심전도 검사를 한 뒤

유명하다는 그 의사는 사무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초음파를 봐야 하겠군요. 날 잡아 드릴 테니

검사하시고, 결과 보러 나오세요."

"오늘 하면 안될까요? 제가 너무 시간이 없어서요..."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하고 싶진 않았지만 다시 검사하러 오고,

결과 보러 오고, 그렇게 지낼 시간 만으로도 나는 지레 숨이 넘

어 가는 거 같았다.

"시간이 되겠나 오늘?"

내 얼굴을 한 번 쳐다 본 의사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돈 준비해 오셨어요?"

"네, 네 있어요!"


그리고, 결과가 나오는 오늘이 되기까지 나는 참으로 많은 시간

을 숨죽여 울며 기도했다.

내가 아는 모든 신에게, 그리고 세상을 떠난 부모님에게 , 이모

부에게까지.. 도와 달라고 제발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또 했었

다. 만약 나은이만 괜찮다면 나는 이제부터 세상을 감사하며 사

랑하면서 살겠노라고 약속했었고, 나를 괴롭게 하고 아프게 했

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세상과 화해하고 싶었다.

"김 나은, 들어오세요."

심장이 멎는 듯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은이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어디 볼까?"

그는 잠시 결과물을 들여다 보는 거 같았다. 그리고 얼굴을 들

고 내게 말했다.

"약간, 약간 이상이 있군요. 글쎄, 이 정도면, 약도 복용하지 않

아도 될 꺼 같아요. 그런데 조금 더 크면 어떨지 그건 장담 할

수 없네요. 구멍이 저절로 크면서 메워지는 경우도 있고,반대로

커지는 경우도 있거든요. 2년 후에 다시 오세요. 오늘은 그만 가

셔도 되구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감사를 한다는 건지도 모르게 수 없이 감사하단 말을

하면서 나은이와 병원을 나섰다. 지옥에서 바로 빠져 나온 거 같

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깨끗한 건 아니라니,새삼 마음속에 지녀야할 십자

가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년이라는 긴 세월을 나는 또 속으로 은

근히 조바심 내며 살아야 겠지...하지만, 이것 만으로도 너무 감

사하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나은아, 엄마가 아이스크림 사줄까?"

"엄마, 주사 안 맞아도 돼?"

"그으럼..."

자식을 키운다는 일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인 줄, 낳아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 엄마가 나를 지키기 위해

죽는 그 순간까지 내 이름만 불렀다고 이모가 전해 줬었다. 나

도 그럴까,,우리 나은이를 지키기 위해서 라면...


"내사 마, 그럴 줄 알았다. 방정을 떨고 난리를 죽이더니 속이

후련 하재?"

"언니 고마워 하여간.."

"우리 엄마, 말을 해두 꼭 저렇게 한다니깐."

집으로 돌아와서는,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윗층 식구들과 함께

즐거운 저녁 시간이 되었다.

"니는 경상도 가시내가 잘 되지도 않는 서울말 쓴다꼬 웃기는

거나 아나? 볼펜을 백날 천날 물고 난리쳐봐라. 어디 펴지나?"

"엄마!"

"왜들 그래. 나은이가 또 싸우는 줄 알겠다..."

"아니야 엄마, 안 싸우는 거 다 알아."

"그래?"

"응."

"어떻게?"

"언니랑 아줌마는 저렇게 사랑하는 거야..."

"뭐라꼬? 이 백여시 같은 가스내 봐라..."

웃음꽃이 피던 그 밤은 행복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슬며시 후회 되기 시작했다.

혹시도 있을지 모르는 나은이의 수술을 나혼자 대비하느라 그의

결혼식에 갔던 일이 떠 올랐다. 이렇게 별일 아닐 줄이야...

하지만 돌이 킬 수 없는 일은 후회하지 않겠다고 나는 결심했

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도 다짐했다.

아마, 그를 볼 수 있는 날은 우리 모녀에게는 다시는 없으리라

고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