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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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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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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날들에 대하여


BY 로미 2000-09-01


4.살아가는 날들에 대하여


"나은이...잘 자라~"

"응, 엄마. 다녀오세요."

"그래, 자다가 쉬 마려우면, 혼자 일어나서 잘 할 수 있지? 무서

우면 신애 언니한테 해 달 라고 해?"

"엄마, 걱정하지 마. 나은이 아기 아니야."

"그래, 그래..우리 나은이 정말 이뻐...."

딸애의 잠자리를 지켜 주지 못하고, 새벽시장을 보러 나가야 하

는 날, 언제나 가슴 아렸지만, 나은이는 울거나 보채지 않고 잘

견디어 주었다.

잠들 때까지 곁에서 책을 읽어 주고 자장가를 불러 주는 행복한

유년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내게도 남아 있었다. 엄마는 항

상 내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 주었다고 이모가 말해 주지 않았어

도 기억 어딘가 아슴프레 하게 남아 있는 엄마의 낮은 음성을 가

끔 꿈속에서 느낄 때가 있었다.

그래도 나은이는 내가 엄마를 잃었을 때 보다 이제 더 성장한 나

이이고, 또래에 비해 일찍 철들고 씩씩한 아이였다. 아이가, 나

이보다 일찍 철 들었다는 건 삶의 고단함을 벌써 조금은 알았다

는 거라고 난 생각했다. 그게 마음 아팠지만, 나은이를 낳으면

서 벌써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다해 사랑해 주는 일밖에는 나은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닐까....


"신애야, 나은이 잘 부탁해..그리고 정말 언제나 미안해.."

"언니는, 그런 소리하지 말랬지? 나은이 옆에서 공부도 하고 좋

지 머. 맨날 여기서 자래면 좋겠다. 우리 엄마 TV켜 놓고 자는

통에 시끄러워 죽는 거 알지? 걱정 말고 운전이나 조심해."

"그래 고마워...."

낮엔 회사에 다니면서도 야간대학에서 공부하는 주인집 딸 신애

는, 그 엄마처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었다. 내가 장을 보러 가

야 하는 날이면 내려와 아이 곁에 있어 주곤 했다. 남에게 부탁

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처음에는 나은이를 업고 다녀야 했

다. 어쩔 수 없이 차도 구입해야 했다. 다른 상인들과 같이 대절

버스를 타고 물건 하러 가면 좀 편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어린

나은이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아이를 싣고 다니는 일이 힘들었지

만, 사정을 알고 신애는 자청해서 밤에 아이를 돌봐 주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돌 봐 줄 친척도 친구

도 하나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며 먹고산다는 일은 매일 매일이

소리 없는 전쟁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내게 주어진 대로 받아들

이며 살기로 한 이상 난 용감하게 싸워 나가는 중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가자,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며칠 심하게 마음을 앓았지만, 어쩌면 수술을 하게 될지도 모르

는 나은이를 위해서 더 이상 맥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가을이 다

가오고 있었고 추석대목도 미리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추풍령 휴게소 가까이 다가가자 너무 많은 비 때문에 시

야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차를 휴게소에 주차시키고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아가씨!"

휴게소 문 앞에서 어떤 젊은 청년이 종이 잔에 담긴 커피를 불

쑥 내밀며 내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요?"

"이거 드세요!"

"어머, 왜요?"

"아니요, 이상하게 생각지 마시고, 비도 오는데 천천히 이거 드

시고요, 저 좀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신 데요?"

"아가씨한테는 별 일 아닌데요, 저한테는 큰 별 일 이거든요..."

그는 뭔가 곤란한 일이 있는 듯 보였지만 싱글거리며 얘기 했다.

"이거, 받기 전에 먼저 도울 일이 뭔지 말씀해 주실 래요?"

"의심이 많으시군요.무슨 일이냐 면요, 제 차가 시동이 안 걸려

서요, 아가씨 차 힘 좀 빌릴려 구요. 밧데리가 방전 되었나 봐

요. 근데, 누구한테 부탁할까 조금 전부터 여기 서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비도 오고, 밤도 늦어서 그런지 차도 별로 없네요.

주무시는 분들 깨워서 부탁하면 맞을 꺼 같아서요. 도와주실 수

있죠?"

"그러죠 뭐, 그럼 그 뇌물 저 주시죠 인제."

"넵! 고맙습니다."

나는 커피를 받아 들고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일어

날 수 있는 일이었고,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면 마땅히 도와

야 할 일이기도 했다. 부탁하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한 걸 보니

유쾌한 청년 같았다.

"바쁘세요?"

커피를 마시고 있는 데 그가 물어 왔다.

"네, 바쁜데 이렇게 쏟아지니 좀 쉬어야 겠네요. 이거 다 마시

고 차로 가서 도와드리죠."

"전 별로 안 바빠요. 가실 때 해 주셔도 되는데...그리고 어차

피 시동이 걸려도 서울까지 가지도 못할 것 같고, 가까운 데로

빠져서 날이 밝으면 어디 카센터에 맡겨야 겠네요."

"그렇겠네요."

"빗줄기가 좀 가늘어지는 거 같으니까 그럼 차로 가죠."

그의 차는 다행히 시동은 걸리는 거 같았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그럼 이제 됐죠? 고생하세요.."

"참 근데 아가씨 은혜는 어떻게 갚죠?"

"저 아가씨 아니 예요, 아줌마예요. 그리고 아까 커피 잘 마셨으

니까 됐어요."

"에이, 제가 괜히 귀찮게 할까봐 그러시는 거죠? 정말 고마워서

그러는 건데."

"정말 이예요."

"무슨 아줌마가 이렇게 늦은 밤에 혼자 차 몰고 다녀요? 아저씨

한테 혼 안나나요?"

"자 그럼 이만 가봐야 겠어요."

그가 내 차 문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나는 손으로 차를 가리키면

서 말했다.

"인연이 있음 또 보게 되겠죠?"

"글쎄요, 그렇겠지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아가씨"

나를 끝까지 아가씨라고 불러 주는 그가 밉지는 않았다.


차를 출발시키고 나서 룸미러로 잠깐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아줌마라고 하기에는 젊은 나이인가,,,하긴, 미혼모는 아

줌마는 아닌 거 아닐까?

호적상 나는 아가씨이고, 나은이랑은 동거인 일 뿐이었다. 법적

으로는 그러니까 완벽하게 아가씨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웃겨서 잠시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정신적으로 나는 아줌마였다. 신애 말처럼 몇 십 년이

나 결혼 생활을 한 노련한 아줌마보다 더 아줌마 적이었다. 이

제 겨우 서른의 나이에, 온갖 풍상에 시달리느라 나에게 남은

건 오로지 악 밖에 없어 보일 때도 있었다. 시장에서 애 데리고

혼자 장사를 하는 여자를 함부로 보고 덤비는 남자들을 상대 할

때나,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트집을 잡아 곤란하게 하는 여자들

을 대할 때 나는 악다구니 치며 그들과 싸워댔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세상을 향한 내 적개

심이었다.

아무 탈없이 잘 살아가는 행복한 부부들과 아이들, 그 평범한 세

상 한 귀퉁이에 끼지 못하고 이렇게 곁가지 같은 삶을 사는 나

는, 나와 내 딸이 상처받는 일이 많은 이 세상을 증오했다.

낳기로 한 때부터 이미 각오는 했어도 도처에 지뢰밭을 걷는

것 같은 일 투성 이었다. 여섯 살이 되면 보란 듯이 번듯한 유치

원에 넣으려던 계획조차도, 아버지와 함께 하는 행사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다. 편협하다고, 내가

너무 민감해서 그렇다고 신애와 언니는 만류했었고, 나은이가 당

당히 적응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아직도 준비가 덜

된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해 보는 데까지 해 보다가, 이 나라에서 나은이가 상처받고 잘

자랄 수 없을 꺼 같으면,,난 이민 갈 꺼야."

"하이구마, 니 잘났다. 억수로 잘났데이, 나은이가 니를 안 닮

은 게 천만 다행이다.건 아나?"

신애네 모녀는 혀를 끌 끌차면서도 나를 이해해주려고 노력했

다. 이 세상에서 내가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었

고 그나마 내가 더 팍팍해 지는 걸 막아주는 방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