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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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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상으로


BY 로미 2000-08-31

2. 다시 일상으로.


"나은이 잘 댕겨 왔나?"

"네. 이쁜 공주 같은 언니두 보구요, 멋있는 아저씨도 보구요,

지하철도 타 봤어요."

"또 그리구요, 엄마랑 여관에서 잠두 자구요,,아이스크림도 무

지 많이 먹 구요,..."

어린이집 차를 타러 나가다 마주친 주인집 아줌마에게 나은이는

자랑을 늘어 놓았다.

마음 좋은 그녀는 싱글벙글 하면서 들어 주었다.

"아이구 나은이는 좋겠따 마, 난 서울 구경 함 도 못해 봤는

데..."

"네 서울은요, 진짜, 넓고 좋아요.."

"진짜? 너그 집보다 더 좋나?"

"아니요, 집이 더 좋지 만요."

"나은아 이제 그만, 어린이집 차 올 시간이잖아, 빨리 나가야지

차 지나간다..."

"있다 댕겨와서 다시 서울 얘기 해 줘 어?"

"네 에~"

나풀나풀 나비처럼 가볍게 딸애는 차를 타고 어린이집으로 향해

갔다.

대문을 들어서자 그녀는 팔장을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니 내 쫌 보자!"

"가게 문 열어야지, 언니. 이틀이나 못 열었는데..."

"그래 속이 후련하나?"

"언니...있다가 얘기 하자 니까.."

"그래 내 가게로 나갈끼구마. 니는 참말로 못 된 데가 있는 거

아나?"

그녀는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런가?"

나는 씁쓸히 웃었다.


상가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어디 아팠느냐고 인사를 건네기 바빴

다. 하긴, 독하기로 소문난 내가 이틀이나 문을 닫아 둔 채 여행

을 떠났었으니 그런 궁금증도 당연하긴 했다.

"서울 이모님 댁에 다녀왔지요.이모님이 좀 편찮으셔서요..."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았지만, 그래도 앵무새

처럼 같은 대사를 읊어댔다.

잔잔한 음악을 틀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물을 올려놓고, 가게 안

에 빠진 물건을 체크해 나가는 동안 그녀는 달려 왔다.

"언니, 가게에서 무슨 얘길 듣겠다는 거야?"

"아침이니까 손님도 없는 데 뭐.."

"뭘 듣고 싶은데?"

"뭐,,듣고 싶다기보다..."

내가 포기 한 채로 묻자 슬며시 내 눈치를 살피며 그녀는 말을

얼버무렸다.

"커피 한 잔 줄까?"

"어제 밤에 들어오는 거 봤다..니 안색이 말이 아니더구만. 뭔

일 있었나?"

"무슨 일이 있었겠어?"

"혹시 나은이 알아 보드나?"

"언니, 웃기지마...핏줄이 땡긴다 그런 말 난 안 믿어..."

"니 그럼 뭣 땜에 서울까지 간 건데?"

"몰라서 묻는거야?"

나는 그녀에게 내가 말하지 말아야 할 얘기들을 쏟아 냈었던 걸

잠시 후회했다.

아무도 없는 우리 모녀를 정말 식구처럼 대해주는 그녀와 그 가

족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어느 날 마음을 허물고 살아 온 내 얘기

를 들려 줬던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하지만,나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차서 그?O었던 것만은 아니

었다.

우리 모녀에게는 누군가 사정을 알고 도와 줄 사람들도 필요했

던 것이다. 그게 살아가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는 아무런

말도 누구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삭이기에도 나는 힘에

부쳤다. 그러나 맘 좋은 그녀지만,호기심을 억누르기 힘들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나의 방패

가 되어 주기도 하는 그 호기심을 애써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

었다.

"병원 가는 날이 언제지?"

내 기분을 알아 챘는지 그녀는 한 발 물러섰다.

"모레.."

"괜찮을 꺼구마....나은이는.."

"그래. 하지만 안 좋아서 수술을 한 대도 난 괜찮아 이제. 결과

가 괜찮다면 다행인 거고 죽지야 않겠지 뭐."

"뭔 말을 그렇게 징그럽게 하노? 하여간 너같이 차가분 거 첨 본

다.."

"그러니까 팔자가 이렇잖아..."

나는 일어서서 다시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기분을 감지한 그녀는 슬며시 일어서서 돌아갔다.


그는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겠지..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울컥 치

밀어 올랐다.

하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가 신혼여행을 즐기든, 어디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그게 나

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세상에 흔하다 흔한 여러 사람 가운데 그는 하나일 뿐이다.

내 생애 있어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이름이기도 했지만, 떠나

올 때 내 안에 이미 그는 죽었지 않았던가.

나은이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결함이 발견되지만 않았어도, 결코

그를 찾아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사고라도 만에 하나 나은이가

잘못 되었을 때 아빠 얼굴 한 번 보여주지 못한 게 한이 될까

봐,,,나는 어려운 결정을 한 거였다.

하긴,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것조차 내 치기에 불과 했었던 건 아

닐까 후회되기도 했다.

나은이가 보게 된 아빠의 모습이란 게 하필, 다른 여자와 결혼하

는 거였으니...나중에 그 애가 이 사실을 알면, 나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나은이 심장의 결함이란 건 별 게 아닐지도 모르는 데 내가 쓸

데 없이 예민해져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라고 해도 그의 결

혼이..내게는 또 다른 배신으로 느껴졌었던 건 아닐까...

전화벨이 울릴 때까지 나는 그렇게 갖은 상념으로 멍청히 서 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