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걱정 많이 하셨어요?
속상하게 해 드려 죄송해요.애기들이 다치면 오래 걱정하시는
걸 알면서도 저까지..정말 죄송해요.
엄마랑 아빠도 많이 놀라셨구요,가슴 아파하셨지요. 제 손바닥에
는 조그맣게 젓가락 자국이 났지만 상처가 아픈거보다 마음이
더 아팠어요.
엄마랑 아빠랑 정말 사이좋은 부부가 될 수는 없는 걸까요?
제 손바닥에 뻥 뚫려 버린 화상 자국보다 더 큰 건 아마 제 맘
에 난 구멍일 꺼예요. 그걸 메울 수 만 있다면 전 손이 아픈 것
쯤은 다 참을 수 있을 꺼 같아요.
아이들한테는 언제 어디서나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는 거잖아
요? 그런데도 오히려 제가 다친 일로 엄마 아빠 사이가 더 나빠
지는 게 아닐까...전 너무 걱정 되서 잠도 오지 않았어요.
다행히 두 분다 아무 말씀 없으셨지만요.
병원에서 돌아 와 가슴을 쓸어 내린 엄마는 거의 혼이 나간 지
경 이었어요.아빠도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워 대셨죠.
-어머니가 아시면 뭐라고 할 꺼예요.곧 아시게 될텐데.날 아주
몹쓸 년 취급하실 꺼예요
-뭘 말씀 드릴 꺼 까지야 있겠어? 좀 있음 아물테고,괜찮다잖아
-웬일이예요? 당신이 날 위해서 어머니께 거짓말을 다 하겠다고
하고?
-거짓말 한다고 안했어. 말씀 드리지 말자는 거지.
당신 그렇게 항상 꼬는 거 질리지도 않아?
아빠는 방문을 꽝 닫고 들어 가 버리셨지요. 엄마는 머쓱한 듯
서 있다 쇼파에 누워 있는 저를 안아 주셨어요.
-지웅아~ 엄마 밉지?
세상에 자기 엄마가 미운 애기가 어디 있겠어요? 엄마는 그럼 제
가 미운가요?- 전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어요. 그대신 엄마~하고
부르고 말았지만요.
이렇게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다면 전 어떤 어른이 될 까요?
전 가만히 생각해 보았죠. 온 몸에 가시가 돋친 선인장 같은 사
람이 되지 않을까요? 누구든 손을 내밀어 만지려고 하면 달려들
어 다치게 해버리는 그런 사람요.그런 심성을 가지게 되지 않
을까요? 전 그런 어른이 되는 게 너무 싫어졌어요. 하지만 사막
같은 우리 집에서 선인장 같은 사람 밖에 더 나오겠어요? 저도
맘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요.
엄마는 결국 아빠 짐을 모두 옮기기 시작했지요. 이사 하는 것
만큼이나 일이 많더군요. 그래도 안방 장롱 안에는 아빠 와이
셔츠랑 넥타이 바지 같은 아빠 냄새가 나는 옷이 있었는데,모두
옆 방으로 옮겨졌어요.
거실 한 가득, 안방에서 끌어 내온 아빠 짐을 정리하느라고 소
란 스러운데 혜린이 아줌마가 오셨어요.
-뭐하는 거니 지금?
-한 집안 안에서의 별거.
-애가 다쳤다고 했을 때,정신이 좀 들어 왔나 했더니 너두 정말
구제불능이야.이게 뭐냐 도대체?
-그럼 어떻하니. 이혼은 안된다고 하고. 애가 다친 거..그래 지
웅이한테 너무 미안하지. 싸움 하느라고 애를 못 봤으니까. 하지
만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야. 어쩌겠니 그럼.
-차라리.지웅이 주고 나와라. 애한테 정말 이건 더 못할 일이야
쟤,좀 있음 돌이다 너. 돌 때도 이런 채로 아무렇지 않게 잔치
할꺼니? 그리고,애가 저렇게 조숙해 보일 수가 있냐. 다 환경
탓 이야.
-그것도 지웅이가 가지고 태어난 팔자지 뭐. 다 각자 책임지는
거야.
-애는 부모의 책임이지. 물론 너희 부부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
난 것도 쟤 운명이지만,이혼한 부부보다 더 못한 환경이야 이건
엄마는 짐을 정리하던 손을 놓고 멍하니 앉아 한숨 쉬었지요.
-그래서 어쩌라구?
애 땜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비위 맞추고 살라구?
난 그럴 수가 없어. 입에 거품물고 달려들어 나를 때리던 그 눈
빛을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 나두 지웅이 때문에 어떻든 잘
대해 줘 보자 다짐 한 적도 있지만,,안돼는 걸 어떻게 하니...
지웅이는 내가 키워야 하겠구...어쩔 수가 없어.
-아유,모르겠다 난. 정말 손 쓸 방법이 없구나 니네는.
그래요.
손 쓸 방법이 없는 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 엄마 아빠 전부 얼굴을 모르는 애들 보다는 행복하다
고 그렇게 믿기로 했어요. 엄마가 버리고 떠나지 않고 저렇게 애
쓰고 힘들어 하는 것도 저 때문이니까요. 사막 한 가운데 선인
장 처럼 되버린다 해도 어쩔수 없잖아요....
아빠가 저녁에 돌아 오셔서 작은 방 문을 열어 보셨지요.
전 가슴이 두근 두근 했어요. 엄마는 거실 쇼파에 앉아 TV를 보
고 계셨지요. 리모컨으로 TV를 끈 아빠는 엄마에게 말씀 하셨어
요.
-괜한 수고를 했군.
-무슨 말이예요?
-난 카나다로 발령 났어.
-뭐라구요?
-외국지사로 나가기로 했다구.
-언제요? 그런 결정을 하고도 나에게 왜 이제 얘기하는 거죠?
-말할 시간이 없었잖아...그리고 당신에게 같이 가자고..그렇게
말하려는 거야.
-난 싫어요.
-한 마디로 거절 할 줄 알았지.그래서 더 말 꺼내기 어려웠어.
좋아. 그럼 나 혼자 가기로 하지.
-얼마나 오래 있는 건데요?
-어쩜 영원히...이혼은 더 나중에 생각해 보자구.
만약, 당신이 들어 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그렇게해.그러나,다른
사람이 생겨 재혼하기로 마음 굳히면 지웅이는 내게 보내 주겠다
고 약속해 줘.
-당신이 재혼을 한다면요?
-당신이 재혼해서 의붓아버지 밑에서 크는 거보다야 낫겠지.
-계모는 괜찮구요?
-이런 말싸움 계속 하고 싶지 않아.나도 당신한테 지쳤어.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야. 떨어져 있는 동안 당신도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래. 이혼은 그렇게 급하지 않잖아.
-그러죠...
아,전 너무 놀랬어요. 결국은 아빠를 못 보게 되는 건가요...
아빠!전 아빠에게로 기어 가려고 했어요.그런데,다친 손이 아파
서 제대로 기어 갈 수가 없어서,걸어가려구 했지요.그런데 일어
서 지긴 해도 발걸음을 뗄 수가 없더라구요. 그대로 서서 울어
버렸죠. 엄마가 달려와 절 안아줬지만 전 버둥대면서 엄마에게
서 벗어나려 했죠. 결국 우리는 이렇게 헤어지는 건가요?
아빠가 다가와 엄마 품에서 몸부림 치는 절 안아 들고 작은 방으
로 들어갔어요.
전 아빠랑 나란히 누워 본 적이 별로 없었어요. 아빠는 절 눕히
고 가만히 안아 주셨어요. 그리고,부드럽게 말씀 하셨어요.
-지웅아, 니가 더 크면 아빠가 목욕도 데려가고,목마도 많이 태
워 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아빠가 좀 서툴렀나부다. 너에게도 엄
마에게도.널 더 많이 사랑해주고 싶었는데.그렇지만 지웅아,아빠
는 항상 널 사랑한단다. 그건 알지? 같이 있지 못해도 아빠가 언
제나 널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변함없을 꺼야...엄마 속
썩이지 말고 다치지 말고...씩씩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알겠지?
내가 그 말들을 다 알아 들을 꺼라고 아빠는 생각하셨을까요?
전 가만히 아빠 볼을 쓰다듬었어요. 나랑 정말 많이 닮은 우리
아빠...아빠를 사랑해요.
아빠가 떠나기 전에 제가 -아빠 사랑해요! 라는 말을 할 수 있어
야 할텐데요...그럴 시간이 이제 없는 거 같았어요. 그렇지만
전 아빠를 정말 사랑한다고,,그렇게 아빠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제 두 손을 통해 아빠 볼로 그 사랑이 전해졌을까요? 그?O겠죠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