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저 좀 도로 데려가 주세요....
저 이제 살고 싶지가 않아졌어요.
정말이지, 다음 번 생이 있다면,
사람 아니고 짐승으로 태어나도 좋으니 맘 편하게 살다
평화롭게 눈 감고 싶어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만 배우고 내가 할 도리만
착실히 하면서 순리대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앞으로 제가 커서 그렇게 살면 되는 거라고요?
전 벌써 그렇게 살기는 힘들 거 같아요.
할머니,
저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여있는 아기들 많다는 거 저도 잘
알아요. 그 애들에 비하면 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애인지도
잘 알아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아기들이 태어나려고 노력하
는지,할머니가 그 애들에게 고루 기회를 주려고 얼마나 오래 노
심초사 하고 계신지 알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전 이만 다시 가고 싶어요.
전 이집에서 필요한 존재가 아닌 거 같아요.
저만 아니면요, 엄마는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꺼예요.
어제 엄마가 친구랑 통화 하는 거 들었어요.
엄마가 그러더군요...제가 돌이 될 때 까지만 살겠다구요.
전 보행기에 타고 앉아서,열심히 앞으로 뒤로 운전 연습 중이었
는데,가슴이 쿵하고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제 6개월 남았구나...그 후에 나는 엄마나 아빠,
어느 한 쪽과 떨어져 사는 아이가 되겠구나...그런 생각을 하
니 참을 수 없어졌어요.
화가 난 저는 보행기를 밀고 현관으로 냅다 달려버렸어요.
그런데 문턱이 낮아서 뒤집혀 죽진 않았어요. 옆으로 자빠져서
엥~하고 울어 버리기만 했지요. 아파서 운것도 놀래서 운 것도
아니고 서러워서 울어 버린 건데 엄마는 전화 수화기를 팽겨쳐
두고 달려와서 제게 이?O어요.
-어이구,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현관에는 왜 나가 버린거
야.이럴 때 보면 꼭 지 아빠야! 괜찮아.울지마,안다쳤어.
지웅이,놀랬니?
제게 별 이상이 없어 보이자 엄마는 전활 계속 했어요.
제가 그 때까지도 앵앵거리며 울고 있었는데도요.
-오빠가 말이야,그 여자랑 결혼하겠댄다.
이혼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잘됐네. 이제 그럼 끝이 되겠네.너무 잘됐지 뭐.
혜린이 아줌마는 엄말 비웃는 거 같았어요...울 엄마만 자기 감
정에 취해서 모르고 있는 거였죠.
-오빠가 나 때문에 결혼하려고 서두르는 건 아닐까?
-야,꿈깨.제발.
-무슨 소리야?
-내가 만나봤어...저번에.
-니가? 왜?
-만나서 물어봤어.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그?O더
니 그러더라. 널 좋은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어쩌다 술취
한 그날,실수 한 거라고. 그 놈 나쁜 놈이야,정신차려. 그리고
니가 남편이랑 삐거덕 거리는 거 부담스럽대더라. 이혼이라도
하고 저한테 올까봐 겁내는거지. 이제 알겠냐?
엄마는 내가 옆에서 목걸이를 잡아 당기는 데도 아무 반응이 없
었어요. 무척 화가 난 거 같아서 무서웠지만,어쨌든 우리 식구
를 위해서 다행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엄마는 갑자기 혜린이 아줌마에게 불 같이 화를 냈어요.
-도대체 니가 뭔데 오빨 만난 건데? 언제 내가 이혼 하면 오
빠한테 가겠다구 했니? 니가 뭔데 나서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내가 이혼하려는 건 지웅아빠와 살 수 가 없어서
지,오빠 때문이 아니야! 네가 뭘 안다구 그래?
-웃기지마, 니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넌 그 사람때문에 이혼
하려고 하는 거야. 난 그사람이 너 만큼이나 절실한지 알고 싶
었던 거야. 만약 그?O다면 차라리 너에게 이혼하라고 자신있게
말하려고,그래서 만난거야. 그런데 아니란 말이야. 알겠니?
제발 정신차려!
엄마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 놓았죠.
전 조용히 엄마 품에서 내려와 기어서 제 방으로 가려고 했어요
엄마가 너무 안됐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제 그만 아빠랑 화해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지요.
하루종일 적막한 집안에서 저도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고 잘 지
냈어요.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넋나간 사람같았죠.
그런 엄마를 바라다 보는 건 너무 슬펐어요.
엄마가 하루 빨리 마음을 잡고 우리 집도 다른 애들이 있는 집처
럼 도란도란 행복한 집이 되었으면하고,전 기도하고 또 했어요.
그러다 살폿이 잠이 들어 버렸었나봐요.
꿈 속에서 처럼 아련하게 엄마 아빠의 소리가 들렸어요.
전 엄마 아빠가 대화하는 소릴 너무 오랜 만에 들어서 무척 기뻤
지요.
그런데 잘 들어보니 싸우고 있는 거였어요.
이상한 두려움에 마음 졸이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제 옆에 앉았어요.
-얘기 하다 말고 어딜가?
-나가!지웅이 잠 든거 안보여?
-니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년이야?
-뭐라고?
-나한테 하는 행동은 그래,임신 우울증인가 뭔가로 치부하고 넘
어갈 수도 있어. 그렇지만 엄마에게 그렇게 까지 해야겠어? 아
이가 보고 싶어 오신 노인네에게 그렇게 해야 했냐구?
-내가 뭘 어쨌는데?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시는 걸 내가 언제
뭐라고 한 적이 있어? 어머니가 언제 우리 집에 와서 반찬 한
가지라도 해 주신 적이 있어? 우리 엄마가 해다 준 걸로 이날
이때 먹었어! 며느리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도,동네 노인네들
까지 죄다 끌고 와서 상차리게 하고,도대체 그러실 수가 있어?
오셔서 뭘 해주셨냐고? 울 엄마가 니네 식모야?
왜 우리 엄마가 해 주는 건 그렇게 당당하게 받는 건데?
-누가 장모님더러 와서 도와 달랬냐? 아쉬우면 파출부라도 부르
라니까,니가 안 한 거잖아.그리고,니가 뭐가 그렇게 힘이 드는
데? 지웅이가 특별히 까탈스러운 애도 아니고,밤에 잠을 안 자
는 것도 아닌데. 너 같이 유난스런 여잔 보다 보다 첨 본다.니
가 안먹고 기운 없는 건 알량하게 살빼겠다고 그러는 거 아니었
냐? 도대체 어느 놈에게 잘 보이겠다구 그 난리를 피우냐?
-웃기지마, 먹을 수가 없었을 뿐이야. 당신이 언제 내 걱정 눈
꼽만큼이라도 해 준 적이 있어?
지웅이 아빠로서 이 때까지 한게 도대체 뭐가 있어?
-너,넌 날 벌레처럼 취급하지. 내가 벌어다 준 돈으로 먹고 사
는 년이 항상 날 우습게 취급하고. 니가 뭐가 잘났는데?
할머니,
전 자는 척하고 누워 있었어요.
너무 괴롭고 두려워서 눈물이 나고 주먹이 꼭 쥐어졌지만 잠든
체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저도 모르게 으앵~하고 울음보가 터
졌어요. 한 번 터지자 그쳐지질 않더군요.
엄마가 절 안아들고,아빠에게 차갑게 말했어요.
-취했으면 방에 가서 잠이나 자.
너랑 무슨 대화를 하겠다구,벽하고 하고 말지!
그 순간 아빠가 엄마에게 달려들었어요.
-너 이년, 한 번 죽어봐라!
너같은 년은 죽어야 돼!
아빠는 엄마를 마구 때렸어요. 엄마는 순간적으로 절 안은 팔
에 힘을 주고 몸을 동그랗게 움추리고 맞고만 있었지요.
전 엄마 밑에 깔려서 숨 막혀 죽을 것 같았어요.
너무 놀라서 마구 울어댔어요.
엄마는 절 보호하려고 애 쓰고 있다가,아빠의 매가 이어지는데
도 가까스로 절 옆으로 내려 놓았어요.
그리고 엄마도 아빠에게 달려들었지요.
-이 미친 놈,그래 어디 죽여봐라~ 지 새끼도 죽일 놈이야 넌!
엄마가 달려들어 아빠 팔을 물고, 아빠가 다시 엄마 머리채를
흔들고 전 비명을 지르고,,,옆집에서 사람들이 달려와서 뜯어
말리고...
아득히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만 같았어요.
그리고 우리 집은 이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전 생각했어요.
할머니,진짜루요,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