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안녕하세요...
여기는 점점 더워지고 있어요.
저 벌써 태어난지 백일이 되었대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제 백일을 축하해 준다며 먹고 마시고
한바탕 웃고,,,떠들석하니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제 손마디보다 더 큰 반지도 있었구요,옷이랑 장난감이랑
선물도 무척 많이 받아서 전 너무 행복해요...
그 동안 전 조금 불안했었거든요.
밤에 되도록이면 엄마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 했지만,
자주 배도 고프고,오줌이랑 똥이랑 싸게 되니까 어쩔 수 없었지
요.
엄마가 저 땜에 잠이 부족하다고 아빠에게 투정할 때마다,
아빠는 멀거니 쳐다 보다 배게를 들고 다른 방으로 가 버리곤 하
셨어요.
회사일로 바쁜 아빠는 잠을 자야 한다고 하셨지만,
엄마를 그런 아빠에게 화를 내곤 하셨지요.
-아이는 나 혼자 키우냐고? 나도 자야 살지!
밤에 깨어서 울 땐 당신도 우유도 좀 타고 기저귀도 갈아 줄
수 있잖아!
-난 회사 나가 일하잖아. 당신은 낮에도 잘 수 있고.
당신이 아이가 잘 때 같이 자고 아이가 깨었을 때 아일 보면 되
는 거잖아.
-낮에 잘 시간이 어디있다구 그래?
-아이 맡기고 돌아 다닐 궁리만 하니까 잠이 모자란 거지...
문이 쿵 하고 닫히고,아빠가 옆 방으로 사라지고 나서도,엄마는
화를 못 참고 배게를 던지곤 했지요.
전 너무 무섭고, 이 모든 일이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어쩔 줄
모르겠더라구요.
하지만 할머니,
전 아직 엄마 아빠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아기이니 어쩌겠
어요.
배가 고파도, 기저귀가 젖어도 좀 참아 보려고 해도, 엄마 닮아
신경이 예민한지 참아지지가 않아요.
전 되도록이면 빨리 혼자서 모든 걸 해보려고,열심히 노력하고
있답니다.
우유도 열심히 먹고 있어요. 엄마가 깡통에 든 이유식도 사와서
먹여 주었는데요,별 맛은 없어서 괴롭지만, 열심히 무엇이든 먹
고서 빨리 크고 싶어요. 그래서 그런지 다른 아기들보다 제가 성
장속도가 빠르다고 남들이 그런대요.
그런데도 제 맘은 별로 행복하지가 않아요...
옆 집 아기를 우연히 보았거든요, 어제요.
엄마랑 같이 공원에 산책 나갔다 만났어요.
그 애는 그 집의 막내래요. 오빠도 있고 언니도 있다고 하더군
요. 아침에 아빠가 출근하실 때면 온 식구가 나서서 아빠한테 뽀
뽀를 한다고 자랑하더군요. 전 너무 부러웠어요.
우리 집에서는 아침에 아빠가 출근할 때, 엄마가 자고 있거든
요. 전 안자고 깨어서 아빠를 배웅하고 싶어도,엄마가 절 안고
아빠에게 데려다 주지 않으니 보러 갈 수 가 없어요.
아빠 혼자 밥 챙겨 먹고 조용히 현관을 나서는 소리를 누워서
다 듣고 있어요. 너무 쓸쓸한 우리집 아침이지요.
옆 집 아인,저보다 행복한 거 같아요. 오빠나 언니가 가끔 괴롭
힌다고 투정하지만,제가 보기엔 그것도 너무 부러워요.
우리집은 너무 정막한 거 같아요.
엄마가 절 위해서 틀어 놓는 음악도 전 하나도 재미 없구요,
음악 소리가 편안하게 들리지 않아요. 아빠랑 엄마랑 도란 도란
얘기하는 소리....전 정말 너무 그런 소리가 듣고 싶어요.
엄마가 절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외출을 할때, 그때가
차라리 전 행복해요. 외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절 이뻐해주시니까
우리 집보다 나은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엄마가 절 가지고 나선 한 번도,아빠랑 같이 자 본 적이 없는
거 같애요. 단 한 번, 아빠 아닌 아저씨의 아기씨들을 본 적이
있었지만,저의 다른 동생들을 구경 못했지요.
그건 아마,지금도 그런 거 같애요.
뱃속에 있을 때, 아빠가 찾아와서 저를 둘러싼 양수에 물결을 일
으켜주고, 제가 있는 걸 축복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요.
-나 미치겠어!
차라리 모르는 사람하고 하루 자라면 잘 수 있을 꺼 같애.
도무지 지웅이 아빠랑은 잘 수 가 없어.
소름이 다 끼칠 것 같아...
엄마가, 친구에게 호소하는 소리를 듣고서 전 생각했지요.
아마도 엄마는 아직도 아저씨를 사랑하고 있나보다고요...
그리고 전 언젠가 가까운 날에 엄마나 아빠하고 헤어지나 보다
하고,,,,그렇게 생각했어요.
제 백일 사진을 찍으러 가던 날 아침에 할머니가 오셧어요.
할머니가 아무때나 연락도 없이 드나든다고 엄마는 짜증을 내셨
지만 할머니는 절 너무나 보고 싶어 하셨지요.
엄마가, 연락없이 오시면 싫어 하는 줄 아시면서도 할머니는
절 보러 아무때나 오셨어요. 그것도 친구분들과 함께요.
-우리 손주 좀 봐,,,얼마나 이쁜지. 이 놈 장군감이지...
그렇게 다른 할머니들께도 절 자랑하고 싶으셨나봐요.
그런데 그날은요,
사진 찍으러 간다며 엄마가 분주히 차리고 막 나설 때 였어요.
할머니가 어디 가냐고 물으셨지요.
-지웅이 백일 사진 찍어주려고요.
스튜디오 예약을 해 놔서 지금 가야만 해요,,,어머니. 죄송한데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어서요.
-아니,동네 사진관에서 한 장 찍어 주면 되지,도대체 어디까지
가서 뭘 찍는다는 거냐?
-압구정동이요.
아는 친구가 스튜디오를 해서 그렇게 비싸지는 않아요. 백일상
도 잘 차려주지 못했는데 사진이라도 잘 찍어 놔야죠.
-사진이야 한 장만 있으면 되는 거지, 애 고생시키려고 뭘 끌고
다니고 그러냐.
-어머니, 얜 이날 이때까지 사진 한장 변변한게 없어요. 아범이
애 사진이나 제대로 찍어 준 줄 아세요?
엄마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지요. 너무 서운 했던 모양이예
요.사실 전 그렇게 서운 하진 않았어요. 물론 사진 예쁘게 찍으
면 좋지요. 하지만 사진 한 장 없어도 엄마랑 아빠랑 저랑 사이
좋게 살 수 만 있다면 그게 더 행복한 거 아닐까요?
할머니를 뒤로 하고 사진찍으러 한 시간 넘게 차를 타고 가서
스튜디오란 곳에 갔지요.
사진 찍는 아저씨가 저 보고 웃으라고 하셨지만,전 웃을 수가 없
었어요. 차를 타고 가서 지친데다가 맘 상하셨을 할머니를 생각
하니 도무지 웃음이 나오질 않았어요.
거기는 참 신기한 장난감도 많아서 재미있기는 했지만 전 피곤하
고 힘이 들어서 왕~하고 울어 버렸지요.
결국 그 날은 사진 못 찍고 다음 날 다시 가기로 했지요.
오는 길에 전 잠이 들어 버렸어요.
엄마 앞 가슴 사이에 매달려 피곤한 제 삶을 생각해 보았어요.
제 발에 신겨진 신발이 보이더군요. 아직 걷지도 못하는 제게 엄
마는 비싼 신발을 신겨 줬어요.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요? 엄마는 저 만큼은 최고로 키우고 싶대요.
최고로 크는 거--과연 그게 뭔지 엄마는 정말 잘 알고 있는 걸까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