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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BY 진짜달팽이 2000-07-28


얼마 후 고등학교 때 유도부에서 친하게 지냈던 병희가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오랜만에 얼굴 좀 본다고 다른 문빵에게 일을 미뤄놓고는 그를 만나러 갔다.

술집에 들어서서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뜬금 없이 그녀를 떠올렸다.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스카웃 되어 갔는데 그 팀에서 제일 성적을 잘 내던 유망주였다.

그런데 그 날은 몹시 지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간의 이런 저런 안부를

묻는 중에 그가 내게 말했다.

"나한테도 일자리 하나 마련해줄 수 있냐?"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는 홀로 계신 아버지의 오랜 병치레로 더 이상 운동을 계속할

수가 없다고 했다. 군대 가기 전에 몇 달이고 돈을 모아 수술이라도 시킨 다음 진로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면서 도복 가방의 지퍼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또 룸에서

가방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를 떠올렸다.

"너 말구 형제는 또 없는겨?"

그러자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누나가 있긴 있었는데 나 중학교 들어가던 해에 갑자기 집을 나가 버렸다. 달리기두

잘하구 노래두 잘해서

동네에서 인기 캡이었는데....... 그림을 졸라 잘 그렸어. 지금두 집에 누나가 받은

상장들로 도배를 했지......"

"근디 왜 집을 나갔다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얘기다. 나한테는 꼭 돌아가신 엄마 같았거든. 학교 다니면서

아버지랑 내 빨래 해주고 밥 해주고 숙제 챙겨주고 온갖 집안 일 다 하면서도 얼굴 한번

안 찡그렸던 거 같은데...... 어쩌다 엄마 없는 설움에 울기라도 하는 날이면 누난

날 꼭 안아 주면서 누나가 있잖아, 누나가 엄마야....... 그러더니 지금 생각하면

저두 쬐끄만 게 되게 힘들긴 힘들었을 거다. 근데 아버진 누나 소식을 듣긴 들은 것두

같은데, 아무리 물어두 말을 안하시니까...... 뭐,"

병희는 집 나간 누나 생각이 새삼 간절한지 저 혼자 중얼중얼 한참 동안 누나 얘기를

늘어 놓았다. 그러다가 피식 웃더니,

"누난 나 부를 때 꼭 엄마처럼 우리 병희, 우리 병희 그랬는데....... 야, 내가 오늘

취했나부다. 별소릴 다 늘어놓구 있네."

하고는 뒤로 고꾸라질 듯이 소주잔을 꺾었다. 나는 엉뚱하게 그녀에게도 나만한 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그 동생도 저렇게 그녀를 그리워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희를 만나고 돌아와 나는 형님에게 부탁을 했고 형님은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나는 즉시 그에게 연락을 했다. 병희와 같이 일할 생각을 하니 저절로 두 장딴지에

스프링을 단 것 같이 힘이 솟았다.

며칠 후 병희가 저녁때쯤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날은 바쁜 토요일이긴 했지만

잠깐 틈을 내서 역까지 마중을 나가려고 했는데 형님이 나가지 못하게 했다.

"안돼. 오늘부터 킨스키 잘 지켜야 헌다."

"무슨 말씀이슈?"

나는 깜짝 놀라 형님의 입이 빨리 움직여주기를 기다렸다.

"아, 킨스키 조 년이 며칠 전부터 태식이 형님 쫓아댕기면서 돈 삼 백만 원 안 해주면

나가부린다구 생 강짜를 놓았다는겨. 하두 귀찮아서 오늘 형님이 돈을 해줬거덩.

그러니께 딴생각 말고 감시 잘 혀야 한다. 알았냐? 안 그래두 너랑 킨스키 사이가 심상치

않은 건 내 옛날부터 눈치 깠는디 이번에 실수하면 너두 같이 작당한 걸루 알구

너부터 족칠거여"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을 나온 후로

가족과 연락을 해온 것도 아닌 눈치였고 이 바닥의 오랜 관록 덕분에 빚이 그렇게 많이

깔려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돈을 어디에 썼을 지 궁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병희에겐 전화로 이 곳 지리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혼자 오라고 하고 나는 룸을 들락거리며

그녀의 특별한 재주를 울렁증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밤 열 한 시쯤 병희가 가게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는 룸에서 나오다가 병희를 보고 반갑게

손을 들어 보였다. 술 취한 손님들이 아가씨 하나씩 허리에 차고 괴성을 지르며 나오다가

들어오는 병희를 밀치고 지나쳐갔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이고 담배를

태우며 앉아있던 형님에게 병희를 데려가 소개했다.

"형님, 야가 말씀드린 지 친구여유."

형님은 잠깐 병희를 일별하고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저기 옆자리에 앉아서 분위기나 익히라고 혀. 허고 너는 킨스키 잘 지켜야 혀."

"아이고, 형님. 킨스키 누님 그런 여자 아녀요. 걱정 마셔유."

그러자 형님은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얼른 그 눈을 피하고

옆자리로 병희를 앉혔다. 그 때 그녀가 비틀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친구라며 소개해 주고 싶은 생각에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왔다.

"내 친구 병흰데 오늘부터 나하구 같이 일하게 됐슈."

어정쩡하게 일어서는 병희를 고개를 겨우 들어 바라보던 그녀가 바늘에 찔린 듯

놀랜 느낌이 붙잡고 있던 그녀의 팔을 통해 전해져 왔다. 그녀가 화장실로 다시 뛰어갔다.

나는 병희를 쳐다보고 멋쩍게 웃었다.

"아따, 오늘은 일찌감치도 취해부렀네."

"네 애인이냐?"

병희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나는 옆에 앉아있는 형님을 의식하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녀어... 그냥 여기서 제일 잘 나가는 아가씨여."

"근데 어디서 많이......"

그 때 룸의 손님 하나가 나와 킨스키 어디 갔냐고 홀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그걸 본 형님도

얼른 튕기듯 일어나 그녀를 찾았다. 내가 화장실 갔다고 하자 눈을 부릅뜨며 빨리 들어가

보라고 했다. 이런 일을 오래 하다보면 형님처럼 쓸데없는 걱정거리가 많이 생기는가보다

하며 천천히 화장실 쪽으로 다가갔다. 그냥 문 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건성으로 말했는데

대답이 없다. 속이 너무 안 좋은가 걱정이 되었다. 등이라도 두들겨 주어야겠다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녀는 없었다. 형님이 쫓아 들어와 그녀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내게 욕을

해대며 빨리 찾아오라고 했다.

"내가 뭐라구 했냐, 이 새꺄. 얼릉 가서 찾어와. 못 찾으면 우린 오늘 태식이 형님한테

너두 죽구 나두 죽는겨, 엉?"

그래도 나는 속으로 오늘따라 형님이 왜 저렇게 난리를 치는 지 모르겠구먼, 하며

가게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속을 까뒤집고 있을 그녀를 데리러 뛰어 나갔다.

그 때 형님이 등 뒤에서 병희에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야, 신참. 너두 쫓아갓! 그 년 손모가지에 대못을 박아서라두 끌구왓! 돈 떼먹구 도망가는

년은 반 죽여야 되는겨."

가게 문 밖에 그녀는 없었다. 병희와 함께 샤론스톤과 장녹수를 지나치고 흑장미와

야화를 지나치면서 살펴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숨이 혀끝까지 차올랐다. 동네를 완전히 벗어난 길에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지금 가게로

돌아가면 그녀가 분명히 방에서 자고 있을 거라고, 다른 날보다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그냥 자고만 싶었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