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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우울증을 앓는 20대 여성의 조력 자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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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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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이강민 2000-07-05


안개가 녹아 든 새벽공기가 헤드라이트 앞쪽으로 마치 ?기는 물고기 떼처럼 흐르고 있다. 소리라도 지르면 안개의 장막에 막혀버릴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고립됐다는 느낌은 없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며 어제의 일을 기억속에서 꺼내고 있었다.

총무과의 여직원이 편지 뭉치를 전해준 것은 점심 후 졸음을 잊으려 창가에 서서 자판기에서 막 꺼내 온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였다.
검은 먹구름이 지나면서 뿌린 소나기가 지난 거리에는 오후의 햇볕이 인도위에 조금씩 고여있는 물기에 반사되어 하늘을 향하여 흩어지고 있었다.

일정한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묻혀 지나던 한 여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드는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슬픈 눈을 가진 그 여자가 고개를 돌려 다시 사람들의 흐름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의 짧은 시간은 아주 사소한 일상의 조각이었다.

총무과 여직원은 누군지 알 수 는 없다지만 젊은 여자였다는 것과, 자신에게 봉투를 맡기면서 전해 달라고만 했다고 짧게 대답하고는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건네준 종이봉투는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듯 군데군데가 변색되어 있고 낡았지만 잘 관리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겉면 어디에도 글씨의 흔적은 없었다.
종이로 된 커피 잔을 창가에 내려 놓으며 다시 한 번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비의 흔적을 가로지르며 지나고 있었다.

종이봉투 속에는 몇 개의 작은 봉투가 약간 굵은 붉은색 줄로 묶여 있었다. 가지런하지만 느슨한 매듭을 풀자 작은 반지 하나가 짧은 쇳소리를 튕겨내며 사무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취로 된 작은 반지는 몇 번인가 작은 원을 그리며 돌다 움직임을 멈췄다.
왼손 새끼 손가락에나 맞을 듯한 작은 반지를 주워 책상 위에 놓으며 제일 위에 놓여있던 봉투를 들어 앞뒤를 살펴보았다. 아무런 표시도 없고 텅 비어있는 겉면에는 드문드문 오래된 물 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오후의 햇빛을 등으로 받으며 봉투 속에 든 종이를 꺼내 펼쳤다. 편지였다.

유련.
조금은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제라도 나는 그곳으로 가려 합니다. 나는 되돌아가기보다 당신의 세계에 머무르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항상 적었습니다. 결국 여기까지 흘러왔지만 지금이라도 당신을 위해 운명과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려 합니다.

지난 천년을 세월을 나는 그렇게 보냈습니다. 이제 당신을 떠나면 다시 올 천년의 시간을 나는 황폐한 들녘에 자라는 억새처럼 언제나 메마른 모습으로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보다 당신의 모습이 그 긴 시간의 흐름 속에 희미해 질 것이 더 두렵습니다.

다시는 당신을 잃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윤회의 머나먼 길목에서도 당신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레테의 강을 지키던 사공이 주는 망각의 샘물을 한사코 거부하며 육체는 ?겨 나가도 영혼만은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지금 내 영혼은 통곡의 바위 위에서 지난 삶의 고뇌를 하나씩 덜어 천길 낭떠러지 아래를 흐르는 회한의 강 위로 던져 넣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당신의 세계로 나갈것입니다.

부디 이번 생에는 당신의 삶과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당신의 여덟 번째 생과 나의 두 번째 생이 지나는 날
당신의 치우 씀.

무슨 내용인지 혼란스러웠다.
눈이 아파왔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희미해진 글씨. 유련은 누구이고 치우는 또 누구인가.
전화가 왔다.
조이사였다. 무조건 저만 아는 언어로 고함을 치더니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언제나 무능한 사람은 일이 생긴 뒤에 부산을 떤다.
속으로 곪아 터져도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대꾸하기도 싫었는데 먼저 끊어버리니 속은 편했다.
미련은 없다.
서랍을 열어 벌써 이주일 전에 써 놓았던 사직서를 꺼내 사인을 했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더 이상 회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4월25일자로 사직합니다라고 제출했다가 반려되어 다시 쓴 내용이었다.
아무려면 어떻겠나, 자존심은 경쟁사회에서 부질없는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회사로고가 큼지막하게 인쇄된 봉투에 사직서를 넣고 책상 한 켠에 던졌다.
내일이면 김대리가 그것을 먼저 발견하겠지.
조이사는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을 것이고.
어차피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은 아닐것이다. 집착과 애정은 오히려 불편할 때가 많다.

다시 아까 받은 봉투 뭉치 중에서 약간 두툼한 것을 골라 열어보았다.
흑백으로 된 사진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맨 처음 사진은 세줄로 층층이 늘어 선 사람들이 찍혀 있었다. 가운에 단 한사람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그 다음 사진에는 한 여자가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미소를 짓는 듯 울음을 참는 듯 슬픈 눈매의 여자를 보며 낯 익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나는 의자에서 튕기듯이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여전히 햇빛은 반사되고 사람들은 흐르고 있었다.
분명 사진속의 여자가 짓는 슬픈 표정은 아까 창밖에서 문득 올려다 보던 여자의 눈매와 너무도 닮았다는 사실이 혼란그러웠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다른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