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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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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BY 진짜달팽이 2000-07-10

시장을 꺾어 돌아 한참을 가다보니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어슴푸레 보인다.

열 두 시가 넘은 시간에 그 아파트가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사위가 환해진다.

두 마리의 미친개에 대한 치떨리는 분노와 저주를 토해내던 타원형이 위장으로부터

거부당한 음식물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꼭 그녀가 끽동을 뛰쳐나왔을 때의

모습같이 느껴졌다. 한참동안 등을 두들겨주니까 좀 진정한 듯 나를 돌아보고 씨익 웃는다.

그러더니 이번엔 일어나서 목이 터져라 하고 노래를 부른다. 듣다보니 <한스 밴드>의

'선생님, 사랑해요.'와 '오락실'이다. 짝사랑하는 선생님에 대한 연정을 고백하는 노래와

우연히 오락실에서 마주친 실직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담은 노래를 가열찬 투쟁가

부르듯이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쟤도 쬐그만 나이에 인생을 꽤나 헷갈리게 사는구나.

괜한 일에 말려들었다 싶어 언짢아진다. 하지만 그 애가 한심하지만은 않다. 적어도 노래하는

지금 순간만큼은 남들과 똑같이 선생님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일시적인 환상으로 끝날지라도.

아파트가 훤히 눈 안에 들어오자 먼저 24시간 체인마트가 눈에 들어온다. 갈증도 나고

타원형도 술 깨는데 좋을 것 같아 마트 앞 의자에 앉힌 후 포카리스웨트 두 캔을 사다가

하나 건네주었다.

"어, 뿅가리네. 보도 뛰구 방에 들어가면 같이 방 쓰던 오빠들이 이거 두세 개씩

꼭 사다줬는데. 희한하게 난 술 먹구 이 뿅가리만 마시면 술이 금방 깬다니까....

.... 근데, 인제 그만 뿅가구 싶다. 졸라 힘들어........ 언니, 별박이 알아요?"

"? ........"

"나 이래뵈두 학교 다닐땐 기자 되구 싶어서 방송반도 들어갔었어요. 그래서 공부도

좀 해볼라구 덤빈 적도 있었는데 참고서에 나온 낱말 퍼즐에서 별박이란 말을 봤거든요.

순우리말인데 하늘 높이 올라가서 보이지 않게 된 연을 별박이라고 한 대요.

그럴 때 보면 우리 꼰대들두 깜찍할 때가 있단 말야. 근데 지금 내가 별박이가 된 거 같애.

우리 가족들 눈엔 보이지 않게 된 년이니까요."

별박이라. 유치하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그 말이 왜 필요했을까, 궁금해진다.

연줄이 끊어져 사라진 연을 보고 대책없이 울어대는 아이를 달래려고 우리 아버지

같은 어떤 아버지가 아이의 동심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냈을까? 얘야, 저 연은

높이 올라가 별에 박혔단다. 널 아주 떠난 게 아니라 별에 박혀서 밤마다 네가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별박이라고 하는 거야. 그 별박이가 밤이면 우리 아가 무서운 꿈

꾸지 않고 편안히 잘 수 있도록 지켜줄 거란다. ........ 아니다. 그 아버진 아이의

울음을 달래려고나 했지만 우리 아버진 우는 나를 달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우는 게

너무 힘들어 제 풀에 그치고 나면 가만히 보고만 있던 아버지가 나즈막히 속삭였다.

다 울었냐? 오늘 네가 운만큼 네 마음은 한결 깨끗해졌을 거다, 하고는 다시 책상 앞으로

등을 돌리면 그만이었다. 젠장, 아버지가 속삭였던 말 중에서 유독 다 울었냐, 하는 부분만

귀속으로 에코 마이크처럼 굽이쳐 들려온다.



그렇게 엎치고 뒤치던 끝에 어느덧 아파트 상가까지 이르렀다. 타원형이 상가의 조그마한

슈퍼마켓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엄마의 가게라고 한다. 열 두 시가 훨씬 넘은 시간인데

아직 영업중이다.

"쳇, 울 엄마 집에 들어가기 무서우니까 아직까지 있는 거야. 그런거 보니 울 아부지

아직 살아있긴 한가 부네. 아, 씨발. 나 들어가면 던질 거 하나 늘었다구 졸라 좋아하겠구만.

나, 안 갈래, 언니."

타원형이 불에 댄 듯 우뚝 서 뒤돌아본다.

"들어가. 너 그만 뿅가고 싶다고 했잖아. 이젠 적어도 학교 안의 미친개는 안 만나도

되니까 참고 견뎌봐."

멍하고 나를 쳐다보던 타원형이 처음으로 단정하게 묻는다.

"근데 언니, 그 별박이는 줄이 달린 연일까요, 끊어진 연일까요? 그 퍼즐에서는

그냥 하늘 높이 올라갔다고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줄이 끊어져서 제멋대로

날아갔을 수도 있구, 줄이 길어 그냥 바람 타고 올라갔을 수도 있잖아요. 만약 줄이

긴 거라면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도 있을 텐데.........."

"널 보니까 줄이 긴 연인 것 같다. 너 지금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잖아."

생각과 달리 막연한 의무감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타원형의 얼굴이 장면 전환되는 화면같이

모처럼 앳된 웃음으로 활짝 펴진다. 웃음만큼은 아직 조로하지 않았구나 싶어

나쁘지 않구나 싶어 나쁘지 않다.

인사를 나누고 택시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넜다. 그 애와 등을 돌리고 걷고 있는데

또 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중에 연락할 전화번호 좀 알려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나도 가끔 오늘밤이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성가시게 느껴지는 스물 일곱의 나이다. 가끔 떠오르는 얼굴로 남는 게 서로한테 이롭다.

못 들은 척하고 택시를 잡으러 찻길로 발을 내미는 순간, '언니' 하는 타원형의 소리에

곧이어 날카로운 쇳소리가 밤거리를 집어삼켰다. 나는 손톱이 위로 꺾여 올라가는

소름끼침을 '악' 하고 토해내며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타원형이 솜털같이 가볍게 밤하늘로

올라가 보이지 않게 될 만큼 높이 떴다 육중한 트럭 유리창에 부딪히고 떨어진다.

불길한 예감은 타원형의 토사 세례를 받아가며 거추장스럽고 짜증스러운 경험을 예견한 게

아니었다. 빌어먹을 하느님은 꼭 내가 무방비 상태일 때에만 폭격을 해댄다.

인사하고 돌아서며 오늘의 소낙비 같은 역사는 끝이 난 걸로 생각했는데 영악한 그 자는

벌써 내 머리에 찍은 쉼표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드문드문 지나던 행인들과 아직

철시 전인 상가의 상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타원형이 가리켰던 슈퍼마켓에서

그녀의 엄마로 보이는 아줌마가 뛰어나오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는데

아줌마의 들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름아. 너, 아름니 아니냐? 아이고 아가야. 으허허헝........."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그녀를 알아본 아줌마가 그녀를

부둥켜 안고 절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