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겨울 심심해서 한번 써본 이야기입니다. 읽고 평가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끽동 사진관의 별박이> (1)
낮에 면접 보러 들렀던 건축회사의 면접관은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송두리째 의심해볼 필요가 있음을 충고했다. 합격시켜주는 것도 아니면서
개인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은 그는 정작 자기자신이 절실하게 원하는 길을 선명하게
직시하고 있을까. 낯선 장소에서 익숙한 나를 잃고 돌아오는 셈이다.
인천행 1호선 전철 안의 이 후텁한 공기는 여전히 친숙한데 불규칙하게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나는
몹시 낯설고 수상쩍은 이 기분. 이런 나를 싣고 방금 서울역을 출발하여 둔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전철은 창밖의 네모난 정경들을 점점 빠른 속도로 지워가고 있다.
왜일까. 언제부터인지 무슨 입사나 입회원서 비슷한 종잇장 앞에만 있으면 갓난애의 옹알이처럼
막막해진다. 주소, 이름, 경력난만 쓰고 나면 나머지 칸은 도저히 채울 수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취미도, 특기도, 좋아하는 운동도, 음악도, 색깔도, 비고도........ 쓸 말이 없다.
오늘 다인 건축회사에 그렇게 밋밋한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다. 면접관이 묻는 질문들이란
대개 그간의 경력들이 대부분인데 그 회사의 면접관은 좀 특이했다. 물론 경력에 대한 질문을
안한 건 아니지만 그가 관심을 보인 부분은 낡은 책상 서랍에서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내 사진을 꺼내 보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잊고 있었던 내 예민한 속을 건드렸다.
기분 나쁘다.
"국내외에 인상 깊게 본 건물이 있다면요?"
"올림픽 역도 경기장요."
"왜죠?"
"단순하고 묵직한 아름다움 때문에요."
"그 건물의 가세(건물 네 벽의 중간 부분마다에 대 놓은 ' ^ '자형 보강 부재)에 담긴
섬세한 철학은 모르시나요?"
".........."
"언뜻 보기엔 단순하고 묵직한 것 같지만 그 안에 담긴 복잡하고 섬세한 노력들은
다른 화려한 건물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치열하죠. 특히 가새는 중간에 기둥을
박을 수 없는 체육관의 특성을 보완하기 위한 내자재이면서도 외부로 드러내면서
외장의 핵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거죠. 건축가의 집요하고도 섬세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백미라고 할까요."
그 다음에도 그는 계속 나를 취조라도 하듯이 물었다. 좋아하는 페인팅 톤, 좋아하는 자재,
좋아하는 건축 양식 등등.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그 관심에 적극적으로 부응을 못한 것이 사무실 문을 나설때 들은 그의 신통치 않은
대답의 원흉이었다.
"뭐, 결정되는 대로 연락 드리죠.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윗선에서 또 한번 검토를
할 거니까, 그럼......"
IMF 체제 이후 건축 계통의 회사들이 제일 먼저 맥없이 쓰러졌고 덕분에 잘 다니던
전의 회사도 부도로 문을 닫았다. 그 난리통에도 다인은 꿋꿋하게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고집 있고 소신 있는 회사로 평판이 나 있는 터였다. 그래서 인천에서 두 시간 반이
소요되는 역삼동까지의 장거리 통근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한번 일해보고 싶은 회사였는데,
말짱 쫑이다. 빌어먹을. 시키는 일만 잘 하면 됐지, 내가 좋아하는 건축 양식이나
기호 따위에 대해서는 왜 그리 관심이 많은 거야. 지들이 언제 건축 기사들이 원하는 대로
제대로 지원이나 한번 해줘 봤나. 열나게 고민해서 수정해 놓은 설계도 보고 이건
자재 값이 너무 나가서 안돼, 이건 공사주 취향이 아니야, 미감도 좋고 견실한 것도
좋지만 총 공사비를 생각해야지 따위의 핑계로 뺀찌 놓고 지들 주머니 챙길 생각이나
하면서...... 한심한 세상이다. 이 늦은 밤 인천행 1호선 전철 안에서 고단한 한숨을
조심스럽게 고르고 있는 나나, 맞은편에서 아까부터 내게 연신 꾸벅꾸벅 인사를 올리고
있는 저 노인네의 신산스러운 주름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