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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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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온 풀씨 하나.


BY 로미 2000-07-01

쇼핑봉투를 네 개나 쥐고 택시에서 내리자,슈퍼앞에서 배추를

다듬던 주인여자와 마주쳤다. 조금 난감해졌지만 그녀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마트엘 다녀 오나 보죠? 요즘엔 다들 거기가 싸니까 그리 많

이 가더라. 좀 전에 생긴 물류보다도 더 싸죠?"

"네,그러네요."

"커피나 한 잔 하고 올라가요.이거 다 절였거든요.팔아 보려고

요."

"이거~냉동식품도 있어서. 그럼 갖다 놓고 올께요..."

내키진 않았지만 궁금한 걸 물어 보고도 싶어서 그러마하고 집

에 올라가 부지런히 쇼핑해 온 것들을 정리해 놓았다.

그녀는 커피를 타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한 모금 마시자 마자

활짝 웃으면서 얘길 꺼?Y다.

"저요,애기가 생겼어요. 아들이어야 할텐데..."

수줍은 새댁처럼 얼굴이 빨개지며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악의가 살아났다. 까닭없이.

"첫애인가요?"

"네,그건,저기,솔규엄마한테 아직 못 들었어요?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여기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전 남이 한 얘길 다 믿지는 않거든요. 솔규엄마가 간단히 얘

기 하긴 했지만 본인한테 직접 듣지 않는 건 안 믿는 편이라서

요."

"그래요.지금 남편하고 난 어릴 적 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친구

예요. 서로 사랑했지만 그이가 서울로 유학을 떠나고 나서 전

선을 보게 되었고 결혼을 했지요. 전 공부도 더 할 수 없었는

데,그 인 일류대를 다니게 되었었으니까요.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죠. 결혼 생활은,시어머니와 좀 나빴지만 참을 수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남편하고도요. 그런데,늘 뭔가 답답하

고 가슴 한 쪽이 텅 빈거 같은 그런 날들이었어요. 내자리가 아

닌 거 같구요. 그러다 우연히 지금 남편을 다시 만났죠. 서울

에 가서요. 우리 둘이 예전에 서울 구경을 간 적이 있었거든

요. 덕수궁에요. 그 길을 걸으면 헤어진다고 하면서 우린 그러

지 말자고 일부러 걸었었어요. 거기서 정말 기적같이 만난거죠.

토요일이었고 우리가 첨 거기 간 날이긴 했어도 다시 만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남편도 결혼해서 아이가 둘이나 있는 가장이었

죠. 하지만 결국,우린 이렇게 되었어요. 남편은 모든 걸 버렸

죠.나도 아일 두고 나왔지만요.하지만 내 전 남편은 벌써 재혼

했는 걸요."

"그 부인은요?"

"이혼해주는 댓가로 서울에 있는 집하고 퇴직금 전부를 주었어

요. 근데,아직도 가끔 전화도 하고 찾아 오기도 해요."

"왜요?"

"아이들 때문 이라는군요. 시댁에선 절 받아들여 주었지요. 시

어머닌 아들만 낳으라고 하시고요. 전부인이 더 이상 아일 낳

지 않겠다고 했었나봐요. 난 아들 낳고 싶은데,잘 될까요?"

난 속으로 말했다. 아들이 나온다면 신이 없는 걸꺼라고.

"글쎄,그거야 알 수 없죠."

"근데,왜 제게 이런 어려운 얘길 하시는 건가요?"

"새미엄만,서울 사람이고,절 이해해 줄꺼같아서요. 사람들이 수

군거리는 거 알고 있어요. 남편은 장사가 잘 안되서 막노동이라

도 하려고 해요. 이렇게 살 사람은 아닌데.맘이 안 좋아요."

"두 분이 좋으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각오하고 오신 거잖아요."

내 비꼼을 그녀는 알아 듣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빠져서 내 악의를 눈치채지 못하고 얘기에

만 열중하고 있었다.누군가 이해해주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

고 있음에도 난 그녀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새미 유치원차 올 시간이네요. 저 그만 가 볼께요. 커피 잘 마

셨어요."

"종종 내려와요.나도 심심하니까요."

"네.그럼"


사랑의 모습엔 하나도 같은 게 없다. 나름대로 다 사연이 있고

아픔이 있는 거지만 그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들일 여유가 내겐

없었다. 어쨌든 사랑한단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 상처를 받게

된다면 그 사랑은 비난 받아서 마땅하다고 난 생각했다. 아름다

운 사랑이란 그 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거라고 굳게 믿는 터였으

니까.


그 밤에 새미는 뭘 잘못 먹었는지 밤새 토하고 열이 나면서 시달

렸다.

맘 같아선 응급실로 뛰어 가고 싶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게

남편의 의견이었다. 사실,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도 알 수 없었

다. 아침이 밝아오자 마자,윗층 솔규네 집 문을 두드렸다. 솔규

엄마는 막 일어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새미가 무척 아픈데,어느 병원으로 가야해?"

"새미가? 응,그럼 정소아과라고 있어. 신제주에. 전화번호랑

약도 가르쳐 줄께.택시타고 가면 금방일꺼야. 거기 잘 본다고

소문난 데니까,일찍 가야 할꺼야."

"고마워"

세수만 겨우 마친 얼굴로,입은 그대로 아일 안고 병원으로 달려

갔다. 진료 시작 시간 훨씬 전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아픈 아기들을 데리고 온 엄마들 심정이야 다 같으리라. 너무

나 피곤했지만 이른 시간인데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보니 조금

궁금해져서 옆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 선생님 잘 보시나요? 전 처음이라서요."

"육지서 왔수까?"

"네에~서울에서요"

"여 선생말시,선생도 서울사람이라 하던데요"

"그래요?"

"여기가 고향은 아닌데 말시.잘 본다고 소문나서 아침부터 사람

들이 이렇게 몰려들어요."

"그래요..."

잘 본다니 그럼 새미가 제대로 온 것이겠구나 하고 안심했다.

10여 명이 넘는 앞 환자들 뒤에 새미 차례가 되었다.

"어,새민 처음이구나,어디가 아퍼서 왔지?"

의사는 자상하게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

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눈길이 정다운,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제 밤부터 열이 오르고 토하기도 했어요.열은 39도 가까이까

지요. 벗겨서 찜질도 했고 해열제도 먹였어요. 지금은 열은 떨

어진 상태고요."

내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의사는 웃으며 말했다

"육지서 오셨군요. 어디서 오셨나요? 서울?"

"네,서울요.근데 애는 괜찮을까요?"

"서울서 무슨 일로? 아빠 직장 때문인가요?"

"네. 새미,괜찮을까요?"

"그럼요,감기인데,감기에도 토하는 수가 있지요. 아직 어리니까

요. 위에 바이러스가 들어가니 그런거죠. 먹고 싶어 하지 않으

면 억지로 먹이지 마시고요. 물을 자주 먹이세요. 그리고 모레

나오세요. 새미야, 아주 이쁜 아가씨가 이렇게 아프네. 금방 나

을꺼야.약 잘먹어야 하고 알았지? 새미 엄마 닮아 이렇게 이쁘

구나?"

추리닝 바람으로 머리는 헝클어진채 서 있던 난 머쓱해졌다.

안녕히 계시라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주사실로 향하면서,

저 의사가 유명해진 건 실력때문이 아니라 엄마들에게 아부를 잘

해서 일꺼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이틀 후 병원에 가면서는 옅게 화장도 하고 나섰다.

맨 얼굴에 츄리닝 차림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풀씨 하나가 내게로 날아오는 중이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