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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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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사랑의 모습들.


BY 로미 2000-07-01

앞 베란다에서 한라산이 보이고,뒷 베란다에선 바다가 보이는

집- 남편이 구해 놓은 집은 그런 집이었다.

낯선 곳에서의 하루를 온전히 들떠서 지냈다. 언제든지 산과 바

다를 볼 수 있는 집 얼마나 행복한가...짐을 풀면서도 행복해

했다. 그러나 다음 날, 비내리는 앞베란다 창가에 커피를 들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바로 코 앞 밭 가운데에 무덤이 보였

다. 하나 둘도 아니고 여기 저기에, 무덤들이 평온스럽게 밭

을 가는 사람들 옆에 놓여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집과 죽은 사람이 사는 집이 이렇게도 함

께 놓여있다니,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은 시내엔 집을 얻을

수 없어서 이 집도 어렵게 구한 거라며 미리 말을 막았다. 2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야 할꺼라는 부담이 밀려왔다. 도시에서 자

란 내게 그런 풍경은 익숙할 수 없었고,받아 들이기 어려운 섬

뜩함이 있었다.

그러나,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그 것도 하나의 풍경처럼 받아들

이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이 사는 집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사

는 곳에서 꼭 멀어야 하는 건 아닐꺼고,사랑하는 가족이라면 그

렇게라도 옆에 두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고,그런 식으로 위안

을 삼았다. 매일같이 무덤이 있는 그 밭에서 일을 하시던 할머

니는 내게 그런 확신을 주었다. 아마도 할아버지 무덤일테지.

죽은 남편 무덤 옆에서 매일 일을 하고 있는 걸꺼야..

그런 생각을 하니 오히려 아름다운 광경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동네는 시내에서 10분 거리 밖에 안되었지만 집들만 군데 군데

들어서 있을 뿐 편의 시설조차 변변히 없는 곳이었다. 살고 있

는 빌라 1층에 슈퍼 하나가 있는게 전부였고,동네를 통털어 세

탁소 하나,미장원 하나 뿐인 마을 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윗층에 같은 이유로 서울에서 이살 온 비슷

한 나이의 아기 엄마가 있다는 거였다. 나보다 몇 개월 앞서

제주에서의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내게 도움을 주었

고,내 말 벗도 되어주었다.

그녀는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인지,내가 잘 사귀지 못하

는 동네 사람들과도 상당히 잘 지내고 있었고,온 동네의 소식통

역할을 했다.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지 못하는 내 성

격은 타지에서의 생활을 힘들게 했었는데,난 그런 그녀가 부러

웠다.


"새미엄마,그거 알아?"

"뭐?"

"요기 아래 슈퍼 집 말이야?"

"슈퍼집 뭐?그 집도 서울에서 왔다는 거?"

"아니,그 집 부부 뭔가 이상하지 않아?"

"글쎄,,,"

"그 집 부부말이야,둘 다 재혼한거야."

"그래..."

"그게 말이야,두 사람다 고향은 전남 어디라는데,어릴 적부터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대. 그러다 헤어졌었는데, 10년 만에 우연

히 둘 다 서울로 놀러 갔다가 거젓말처럼 만났대. 덕수궁 돌담

길 에서. 그리고 다시 사랑이 시작 된거지...아저씬 어느 기업

에 잘 나가던 과장이었는데,결혼해서 애도 둘이나 있었다는 거

야, 근데 마누라한테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어주고,회사도 때려

치우고,지금 아줌마랑 여기루 도망 온거야...믿어지냐?"

"안 믿어져...말이 되냐 그게?"

"글쎄,근데 정말이래."

"슈퍼집 아줌마는?"

"그 언니도 결혼 했었다나봐. 애도 있었다는데, 애를 주고 나왔

다지 아마..."

"믿을 수가 없다,난"

"나도 첨엔 그?O어. 근데 잘 봐,이런 시골 조그만 슈퍼에서 애

들 코 묻은 돈이나 세고 있기엔 아저씨 안 어울리지 않아? 나

이사 올때 거의 비슷하게 왔는데, 둘 다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도 꼭 신혼 부부 같더라니까."

"소설도 그보단 현실 적이겠다. 사랑에 아무리 눈 멀어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신기하고 대단하단 거지..."

"난 그런 사람들 이해 할 수 없어. 각각의 상대자들은 무슨 죄

로다 당해야 하는 건데?"

"그러게..."

무료하던 차에 아마도 그건 큰 자극이 되었었나보다. 도대체 믿

어지지 않는 얘기였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너무도 큰 생각거리를

내게 던져 준 셈이었다. 하지만 완강히 난 그 슈퍼부부를 경멸

하기로 했다. 사랑이 아무리 클 지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라

고 믿는 쪽이었으니까.. 딸만 둘 두었다는 아저씨의 부인은 얼

마나 고통속에 괴로울까.

저녁에 남편과 잠자리에 누워 난 들은 얘길 신나게 해 댔다. 남

편 역시 나와 같은 의견일 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 밖에도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참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구나.하긴 어쩐지,이상하긴 했어."

"멋지다고? 당신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자기 인생에서 이루어 놓은 걸 다 포기하고 그렇게 할 수 있

는 사랑,부럽지 않냐?"

"그럼 당신도 그러고 싶단 얘기야?"

"못 알아 듣는 척 하지마,그런 사랑 한 번 해보고 싶은 건 당신

도 마찬가지 아니야?"

"이 사람 정말 안되겠네! 버려진 부인이랑 애들은?"

"남의 일에 왜 열내고 그래? 그냥 사랑에 그렇게 용감한 사람들

도 있구나 그럼 되는걸..."

심드렁한 얼굴로 남편은 돌아 누워 잠이 들었지만 난 내가 당한

일처럼 화가 났다. 그건 용감한게 아니야,하고 남편의 등 뒤에

다 대고 한 마디 더 했다. 그리고 한동안,난 슈퍼에 가지 않았

다. 하나 밖에 없는 슈퍼였기 때문에 새미가 과자를 사달라고

졸라대면 어쩔 수 없이 동전 몇 개 들려서 혼자 들여 보내고 말

았다. 급하게 필요한 것이 생겨도 일부러 택시를 타고서 멀리

에 있는 마트까지 장을 보러 다니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