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도 아래로 장엄하게 펼쳐진 속초 앞바다의 풍광은 내 마음을 송두리째 매료 시켰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동이었다.
감동의 끝에서 나는 또한 한없이 양순해지고 있었다.
대자연 앞에서 이토록 초라한 내가 세상의 모든 수심을 저혼자 짊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건 그순간 만큼 분명 옳지 않았다.
바다는 그 도도한 유영만으로도 내게 그렇게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양구에서 한우 목장을 운영하며 호젓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이모님 내외를 만나뵙고 콘도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바다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쉼없이 철썩거리는 파도소리와
방안 가득 그윽한 바다내음 만으로도 금새 이성을 잃고 허공을 헤매었다.
시인이 된 것 같은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이세상 어떠한 상처도 감싸줄 것 같은 포근한 심성으로 지샌 속초에서의 밤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의 눈물나게 아름다운 교감이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동생과 제부는 엄마를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
토산품 몇가지 산다는 명목이었지만 그것은 딸아이와 나의 뜨악한 관계를 위한 배려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린 서로에게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있던 것이었다.
동생의 의도대로 콘도 안에 딸아이와 둘만 남게 되자
나는 마치 초야의 신부처럼 잔뜩 긴장이 되었다.
외할머니의 자상함 속에서 동생의 재기발랄함 속에서 적당히 용인되왔던 나의 묵비권이
더이상은 유효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딸아이는 발코니 난간에 온몸을 의지한 채 촛점없는 눈으로 바다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아이 곁으로 다가가 똑같은 포즈로 난간에 기대어 섰다.
---벤쿠버가 어떤 곳이니?
---나두 몰라.
---앞으로 네가 살아갈 곳인데 그래도 엄마 보단 잘 알꺼 아냐?
딸아이의 샐쭉한 반응에 무안해진 나는 그 무안함을 무마하려고 애를 써야 했다.
그래도 막힌 물꼬를 터야 할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다.
---모른다니까! 내가 뭐 가고 싶어 가는 곳이야?
가자니까, 가야 하니까 가는 거잖아?
엄마 아빠 이혼한 것두, 이민인지 뭔지도 나한테 한마디라도 상의했었나,뭐?
근데 왜 자꾸 나한테 그런걸 물어보냔 말이야....
발끈 화를 내며 딸아이는 눈물을 감추려고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괜한 짓을 하고 난 사람처럼 벌개진 얼굴로 나는 닫혀진 방문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그래 맞아, 네 말이 다 맞아.
그러나 이혼에 관한 한 그것 역시 엄마의 의지는 아니었단다.
지금 이런 상황 모두, 내가 원하고 상상했던 일들은 적어도 아니란 말이다.
세상일이란게 다 이렇게 불가항력처럼 일어나는 거야.
네 의지도, 내 의지도 다 무시하고 벌어지는 게 인생이란다....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한참동안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인생의 어느 순간 순간 마다 외롭지 않은 적 없었으나
지금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칼바람은 너무 억세고 스산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저 어린 것 가슴 속의 칼바람에 목이 메어 왔다.
적어도 그렇게 떠나 보내면 두고두고 엄습하는 회한으로부터 나는 필시 자유롭지 못할 것이었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서자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숨죽여 있는 딸아이의 등이 보였다.
흐느끼다 지쳐 그새 잠이 들었나....
나는 부드럽게 딸아이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의 떨리는 마음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제희야...이건 너무 상투적인 말이지만, 그래도 이 말 밖엔 해줄 말이 없어.
엄만, 널 사랑해.
그건 어떠한 종류의 사랑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사랑, 독성이 강한 사랑,
그래서 살아가는 내내 끊임없이 이 엄마를 아프게 할 사랑...
너 아니? 넌 내게 그런 존재라는 걸...
딸아이가 엉엉 울고 있었다.
엄마, 미안해...내가 잘못했어....
내 가슴을 갈갈이 찢어 놓으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 계속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