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행선 휴게소의 구내식당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곳 콩나물 국밥이 맛있다는 제부의 말에 요기나 하고 가자며 내린 우리는
왁자한 휴게소 안에서 비로소 여행의 흥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즐거워지는 느낌이었다.
휴게소에서의 주전부리는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묘미였다.
국밥에 우동이며 김밥까지 잔뜩 먹고도 모자라
우리는 호도과자와 맥반석 오징어를 두툼이 챙긴 다음에야 차에 올랐다.
양구를 거쳐 속초로 향하는 여행길이었다.
석달치 월차를 한꺼번에 끌어오면서 까지 휴가를 내어준 제부였다.
남자라곤 청일점인 제부였지만,
노인에서 소녀까지 네 명의 여자를 한치의 빈틈도 없이 철벽 경호하는 든든한 보호자 였다.
그런 제부의 성의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에게 남자란 그런 존재였다.
비무장지대의 군인들처럼, 잘 훈련된 경호원처럼,
내 주위의 온갖 바이러스들로부터 완벽하게 차단시켜 주는 존재.
위태로운 평화전선에서 철통 같은 수비로 불완전한 일상을 온전히 방어해 주는 존재.
내가 이혼을 그토록 거부했던 건 남편에 대한 애정의 잔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게 있어 이혼은 견고한 울타리가 폭풍우에 떨어져 나가는 걸 의미했다.
이혼이 두려웠던 건 그 울타리의 부재가 주는 스산함과 박탈감을 견딜 만한 면역력이 내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날 버리려는 남자를 붙잡는 손길이 너무나 비겁하고 부끄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나는 비바람을 막아준 울타리의 상실을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저울질만 하고 있었다.
비바람을 맞고도 온전할 수 있을까....
휑한 현실 속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손익계산서를 뽑듯이 나는 타산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혼후 내가 얻은 깨달음은 상상외로 시시했다.
소설가가 필시 내공을 다 쌓은 후에라야 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쓰는 하루하루의 현재가 내공을 쌓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날이 써나가는 글쓰기 속에 변증법의 논리가 숨어 있음을 깨우쳤던 것이다.
이리도 무덤덤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면
어쩜 난 그렇게 까지 비굴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엄숙함 앞에서 나는 만학도가 된 기분이었다.
---아이참, 빨리 테잎 바꾸라니까, 이모부!
---야, H.O.T 는 이제 한물 갔다니까 그러네? GOD의 전성시대 아니냐, 임마!
---이모부는 텔레비젼에 나오는 재민이 때문에 GOD 좋아하는 거잖아 머!
---이크, 너 그걸 어찌 알았냐?
H.O.T 와 GOD 의 팬클럽 대변인들처럼 실랑이를 벌이며
앞좌석의 제부와 딸아이는 유쾌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부녀 같은 다정한 모습들 위로 동생의 안색에는 우울함이 감돌았다.
아무 아이나 봐도 좋아하는 남자,
그런 선량한 사람의 공허감을 조금은 알 것 같은 나 역시 우울해지긴 마찬가지 였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는 문득 정현이 보고 싶어졌다.
여행준비를 마쳐 놓고 잠자리에 들려던 무렵에 걸려온 그의 전화.
가게문 닫고도 한참 지난 시각에 그는 술 한잔 걸친 불콰해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영선씨 없어도 가게 잘 돌아간다던 말은 다 거짓말이예요.
있으나 마나 한 녀석 데리고 장사하려니 참나 한심해서....
도움이 안된다니까요, 도움이.
난 말예요,
우리 가게에 와서 영선씨처럼 그렇게 빨리 일 배운 사람 첨 봤어요.
아---,힘들어 죽겠다아! 나 쓰러지기 전에 빨리 나와요.
그리고....보고 싶네요.
하하하...과장되게 웃던 그의 목소리와 상념이 담긴 그의 끝인사는
서글픈 여운으로 남아 그밤 내내 나를 뒤척이게 했다.
우린 뭘까. 그는 내게 뭘까.
분명한 것은 우리 두사람 다 외로웠다는 점이다.
정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자와 현철이 음악의 전부인 늙은 엄마 만큼이나
음악에 관한 한 무식에 가까왔던 나로서는
열심히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멀쩡이 잘 꽂혀 있는 CD 며 카세트테잎을 모조리 꺼내서
가나다 순으로, 알파벳 순으로 다시 진열해가며 음악을 배워 나갔다.
한가한 오전 시간에는 연습장에 하나 하나 적어 가면서 밴드며 가수들의 이름을 익혀 나갔다.
나는 음악애호가가 아니라 점원이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장사에 지장을 안주려고 정공법처럼 음악을 이해했다.
내가 생각해봐도 참 무모하고 단순한 방식이었다.
손님이 들어와 낯선 외국가수의 음반을 요구해도 척척 집어내어줄 단계에 이르렀을 땐 이론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핫뮤직이나 지구촌영상음악 같은 음악전문 월간지를 꾸준히 보면서 쟝르에 대한, 뮤지션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지식한 원칙론자 였던 나는
하루에 음반 하나씩을 온전한 내것으로 습득해갔다.
내 귀로, 그리고 감성으로 모두 체득한 음악을 적어도 나는 손님에게 권할 수 있었다.
레코드가게에서 일을 하며 내가 놀라웠던 것은
세상에 그토록 많은 노래와 가수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는 노래가 음악의 전부인 줄 알았던 내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미처 몰랐던 낯선 가수들, 낯선 음악들 속에서 또한 나는
아름다운 음악이 너무나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은 이렇게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진리에 부딪혔고,
음악의 다양성 처럼 나는 조금씩 우리 인생의 다양성에도 관대해지고 있었다.
<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