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리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커피숍 유리문을 힘주어 밀었다.
남편과 딸아이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턱을 괴고 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딸의 모습이 정지된 화면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하늘색 민소매 원피스에 같은 질감으로 된 머리띠를 멋스럽게 하고 앉아 있는 소녀.
딱 그여자 스타일이야....
6개월 만에 상봉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우습게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건 생경스러움, 낯설음의 감정이기도 했다.
남편과 나,그리고 딸. 세사람은 생전 처음 만난 타인들처럼 어색해 하고 있었고,
그러한 사실에 제각각 당황하고 있었다.
---더 예뻐졌구나,제희는...
긴장감 마저 감도는 분위기에서 가까스로 말을 꺼낸 나는,
저애와 내가 불과 6개월 전까지만도 한지붕 밑에서 웃고 장난치며 때론 투닥거리던
그런 인간적인 사이였던가....하고 피식 웃음이 났다.
---출국 날짜는 오는 일요일이고 세시 비행기야.
제희는 일요일 아침에 내가 집앞으로 데리러 갈께.
남편이 그때까지의 침묵을 깨고 나직하게 말했다.
무언가 더 해야 할 말을 못찾고 있는 사람의 조금은 애틋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면서 서둘러 일어났다.
---아빤 아직 정리해야 할 회사일이 남아 있어서 먼저 일어난다.
그리고는 딸의 어깨를 툭 한번 치고 뒤도 안돌아보고 커피숍을 빠져 나갔다.
커피숍 안에는 여러명의 손님들이 남아 있었지만,
나는 꼭 우리 두사람만 덩그러니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스산함을 느꼈다.
---일단 집으로 가자. 너 온다구 외할머니가 많이 기다리고 계실거야,지금.
그렇게 우리는 형식적으로 쥬스잔을 비우고 집으로 가는 좌석버스에 몸을 실었다.
딸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덜컹거리는 차안에서
대판 싸운 후 잔뜩 의기소침해진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에게서 아이를 넘겨 받긴 했지만 사실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일주일 후면 이 땅을 떠나게 될 딸에게 모정과의 마지막 해후가 될 시간.
그러나, 나는 무엇을 하며,무슨 말을 하며 보내야 할지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지질 않았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부담스러운 손님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남편이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은
그가 새로운 사랑에 빠진 걸 알게 되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충격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언제든 안부를 물을 수 있던 딸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된
그 낭패감도 컸으나, 한 여자의 상처를 발판으로 그들이 펼쳐갈
지고지순한 사랑의 여정을 잔인하게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무엇보다도 온전한 삶을 되찾아가는 나의 눈부신 재기와 성공을 통해
완벽한 되갚음을 해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것이다.
남편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뭐든지 투명하고 맑은 그런 담백한 부류의 인간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여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남편은 내게 무서우리만치 솔직했다.
그것이 날 기만하지 않는 거라 했고, 나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좀더 멋있게 말했던 것도 같다.
나에 대한 마지막 배려,마지막 사랑...어쩌구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 나에겐 그 어떤 소리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놈의 마지막,마지막...그래, 어찌되었든간에 나하고는 끝이다 그거지....
자명한 결론 앞에서 멋을 부리고 있는 남편에게 바득바득 이를 갈고 있는 내 귀는
마지막이라는 단어 만으로 포화상태에 처해 있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버릴 곪을 대로 곪은 고름투성이로 하루 하루를 버티어가던 나였다.
그여자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남편의 고해성사로부터 받은 참담함을 미처 추스리기도 전이었다.
수화기 저편의 여자는 예의를 갖춘 담담한 어조로 내게 만나자고 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머리끄뎅이를 휘저어 놓아도 시원찮을 나에게 되려 네가 쳐들어오겠다구....
그러나, 그여자를 만나고 나서 나는 알았다.
내 가슴을 후려치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들에게 위선을 부려야 한다는 사실을.
드라마의 멋있는 여자들처럼 근사하고 폼나게 결론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만이 무너진 내 자존심의 마지막 보루라는 것을.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들처럼 무심한 상념으로 남은 기억의 필름들이 빠르게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 계속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