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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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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그 후로도 오랫동안.


BY 로미(송민선) 2000-06-15

어리석었던 나 때문에 정우를 고통스럽게 할 수는 없었다.

그가 곁에 있는 건 감미로운 음악처럼 나를 편하게 해주었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이 아닌 걸 알면서도,그를 그렇게 옆에 둔다는 건,너무나

이기적이고 나를 사랑해 주는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정우를 만나러 시내로 나가면서,어떻게 얘길 해야하는 걸까,왜

이렇게 돼 버린걸까,한숨이 나왔다.

"선배님~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다니십니까?"

약속장소에 나타난 정우는 싱글거리면서,장난스럽게 말 했다.

"왔니?"

"왜그래?무슨 일 있어?"

"아니,,,너 한테 할 말이 있어."

"그래?뭔 말인데?"

"정우야~"

"잠깐!"

"왜?"

"고백하려는 거지? 이제 날 사랑한다구?그런 말 안해도 돼.다

알고 있으니까...참, 여자들은 왜 꼭 말로 다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더라."

"정우야."

그의 눈을 바라다보면서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새삼 내 자

신이 초라하고,그에게 이런 말을 해야하는 게 맘 아팠다.

"오늘,영화 보려고 표 만들어 왔지.그리고 근사하게 저녁도 사

려고,있는 돈 없는 돈 다 챙겨왔어. 자 나가자.시간 다 됐어"

"정우야.."

"그리고,그리고 나서 들어도 충분하지 않아?"

".........."

"가자구."

담배갑을 집어 들고 그는 앞장서서 나가버렸다.


영화는 물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우는 옆에서 너무 재미없다며 졸고 있었다. 난 그냥 앉아있었

다. 영화가 끝날 때 까지 그냥 앉아 있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화면을 바라다보고 있자니,언젠가 성진과 영화를 보러

왔던 날이 생각났다. 그 후에 영화를 보러 온 건 정말 처음이었

다. 눈이 몹시 나쁜 성진이 그 날따라 안경을 가져오지 않아,자

막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편해 했을 때,가만가만 그의 귀에대고

자막을 읽어주었었다. 두 시간 가까운 상영시간 내내.

-그?O었지.....................

아직도 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였어. 도대체 왜 내가 이렇게도

도망쳐야 하는 거지. 하지만,돌아갈 수도 없는 거야.그지..근

데 왜 이렇게 돼 버린 거지. 내가 뭘 잘못했지?


졸고 있는 줄 알았던 정우는 가만히 내 옆모습을 바라다 보고 있

었다.

"왜?"

"뽀뽀하고 싶어서."

"뭐어?"

"난 널 꼭 갖고 말꺼야."

"미쳤구나.너?"

"도망가려구?어림도 없어."

자신에게 말하듯 정우는 낮게 중얼거렸다.


방치하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그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그런 중간에 끼여 있었다. 어쩌면 그대로 정우에게

로 모른 척 가고 싶었을 지도 몰랐다.

혜정의 편지를 받지 않았다면. 그?O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언니에게.

오랜만이네요. 언니가 학교에 있다는 걸 알게되었어요. 궁금

해 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 쯤 언니에게 편지를 써야 겠

다고 생각했어요. 오빤 잘 있는지요.

전 잘 지내요. 여긴 제 고향근처예요. 전 다시 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학교도 다니고 있어요. 야간 대학에요. 아무래도 공불

더 하는게 앞으로 제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그래야,더

이상 전 같은 일도 없겠죠.

가끔 아기 생각이 날 때도 있고ㅡ 오빠 생각이 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전 그 때 제가 잘했다고 믿고 있어요. 아기는 좋은 데

다시 태어나라고,전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언니,오빨 용서했나요.

그?O길 바래요.

오빠 잘못만도 아니였어요.

오빤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언니도 아시겠죠.

언니,지금 쯤 두 분이 행복해 졌길 바래요. 오빠한테도 안부전

해주세요. 혜정이,정말 잘 있다구요.

언니도 행복해 졌길 바래요. 제 진심을 다해서 이 편지를 씁니

다.

안녕히 계세요.


혜정이가.


그녀의 편질 읽고 나서 갑자기 난 참을 수가 없어졌다. 혜정인

그렇게 까지 고통받고,다시 일어서기까지 얼마나 많이 힘이 들

었을까.내가 어리광부리며 헤메고 있을 때,그녈 생각지 못했었

다. 그녀가 얼마나 상처입고 힘들어했을까를. 다시 일어서서,내

게 오히려 위로를 보내는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그리고,정말 성

진이 참을 수 없어졌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이런 고통

을 안겨 줄 자격이 있는 가 그는.


탱크처럼 씩씩거리며,그를 찾아 나섰다.

도서관 한 구석에 그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

들이 있는데도 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내가 돌진해가고 있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채,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야,이 개자식아!"

그의 얼굴에다 대고 혜정의 편지를 집어 던지며,나는 소리쳤다.

다들 깜짝놀라 우릴 바라다 봤다.

"자 여??다.실컨 갖고 놀다 버린 니 여자 편지다"

뺨이라도 한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다들 바라다보는 시선을 그땐 이미 느끼고 있었다.


도망치듯 달려,달리고 또 달려서,뒷산 중턱까지 달려갔다.

헉헉거리며 토해내듯 울고 있었다. 다 토해내고 싶었다.지긋지

긋했다. 내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성진은 바로 내 뒤에서 지

키 듯 서있었다.

"경진아,이러지마..."

등뒤에서 나를 안으며 성진은 가만히 말을 했다. 오랜만에 느껴

지는 그의 체쥐를 난 알고 있었다. 정말 그리워했고,다시 느껴

보고 싶던 그의 일부가 이거였던 건 아닐까.

"비켜!"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거라고 나는 내게 타일렀다.

"경진아.이제 그만하고 돌아와. 난 니가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걸 알아. 넌 언제나 내꺼야. 도망치지마. 나도 맘이 편한 건 아

니었어. 그걸.......실수라고 말하진 않을께. 하지만 너까지

잃고 싶진,,정말 ,,잃고 싶진 않아...."

"기다리고 있었어...언제고 네가 돌아 올 날을."

"그래? 그?O던가? 근데 난 돌아갈 수 없어. 널 아직도 사랑하는

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그렇지만 돌아갈 수는 없어. 이제..널

믿을 수가 없어. 널 생각하는 만큼 혜정이도 잊을 수가 없어.그

게 날 미치게 해."

"그래..그럼 그 친구에게 가는 거니?"

"그건 니가 상관 할 바가 아니야."

"아니,상관할 게 있어"

"넌 나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거야."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숲에는, 노랗기도 하고,빨갛기도 한,그림자

처럼 말없이 조용하게,해가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