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었던 나 때문에 정우를 고통스럽게 할 수는 없었다.
그가 곁에 있는 건 감미로운 음악처럼 나를 편하게 해주었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이 아닌 걸 알면서도,그를 그렇게 옆에 둔다는 건,너무나
이기적이고 나를 사랑해 주는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정우를 만나러 시내로 나가면서,어떻게 얘길 해야하는 걸까,왜
이렇게 돼 버린걸까,한숨이 나왔다.
"선배님~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다니십니까?"
약속장소에 나타난 정우는 싱글거리면서,장난스럽게 말 했다.
"왔니?"
"왜그래?무슨 일 있어?"
"아니,,,너 한테 할 말이 있어."
"그래?뭔 말인데?"
"정우야~"
"잠깐!"
"왜?"
"고백하려는 거지? 이제 날 사랑한다구?그런 말 안해도 돼.다
알고 있으니까...참, 여자들은 왜 꼭 말로 다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더라."
"정우야."
그의 눈을 바라다보면서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새삼 내 자
신이 초라하고,그에게 이런 말을 해야하는 게 맘 아팠다.
"오늘,영화 보려고 표 만들어 왔지.그리고 근사하게 저녁도 사
려고,있는 돈 없는 돈 다 챙겨왔어. 자 나가자.시간 다 됐어"
"정우야.."
"그리고,그리고 나서 들어도 충분하지 않아?"
".........."
"가자구."
담배갑을 집어 들고 그는 앞장서서 나가버렸다.
영화는 물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우는 옆에서 너무 재미없다며 졸고 있었다. 난 그냥 앉아있었
다. 영화가 끝날 때 까지 그냥 앉아 있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화면을 바라다보고 있자니,언젠가 성진과 영화를 보러
왔던 날이 생각났다. 그 후에 영화를 보러 온 건 정말 처음이었
다. 눈이 몹시 나쁜 성진이 그 날따라 안경을 가져오지 않아,자
막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편해 했을 때,가만가만 그의 귀에대고
자막을 읽어주었었다. 두 시간 가까운 상영시간 내내.
-그?O었지.....................
아직도 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였어. 도대체 왜 내가 이렇게도
도망쳐야 하는 거지. 하지만,돌아갈 수도 없는 거야.그지..근
데 왜 이렇게 돼 버린 거지. 내가 뭘 잘못했지?
졸고 있는 줄 알았던 정우는 가만히 내 옆모습을 바라다 보고 있
었다.
"왜?"
"뽀뽀하고 싶어서."
"뭐어?"
"난 널 꼭 갖고 말꺼야."
"미쳤구나.너?"
"도망가려구?어림도 없어."
자신에게 말하듯 정우는 낮게 중얼거렸다.
방치하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그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그런 중간에 끼여 있었다. 어쩌면 그대로 정우에게
로 모른 척 가고 싶었을 지도 몰랐다.
혜정의 편지를 받지 않았다면. 그?O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언니에게.
오랜만이네요. 언니가 학교에 있다는 걸 알게되었어요. 궁금
해 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 쯤 언니에게 편지를 써야 겠
다고 생각했어요. 오빤 잘 있는지요.
전 잘 지내요. 여긴 제 고향근처예요. 전 다시 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학교도 다니고 있어요. 야간 대학에요. 아무래도 공불
더 하는게 앞으로 제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그래야,더
이상 전 같은 일도 없겠죠.
가끔 아기 생각이 날 때도 있고ㅡ 오빠 생각이 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전 그 때 제가 잘했다고 믿고 있어요. 아기는 좋은 데
다시 태어나라고,전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언니,오빨 용서했나요.
그?O길 바래요.
오빠 잘못만도 아니였어요.
오빤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언니도 아시겠죠.
언니,지금 쯤 두 분이 행복해 졌길 바래요. 오빠한테도 안부전
해주세요. 혜정이,정말 잘 있다구요.
언니도 행복해 졌길 바래요. 제 진심을 다해서 이 편지를 씁니
다.
안녕히 계세요.
혜정이가.
그녀의 편질 읽고 나서 갑자기 난 참을 수가 없어졌다. 혜정인
그렇게 까지 고통받고,다시 일어서기까지 얼마나 많이 힘이 들
었을까.내가 어리광부리며 헤메고 있을 때,그녈 생각지 못했었
다. 그녀가 얼마나 상처입고 힘들어했을까를. 다시 일어서서,내
게 오히려 위로를 보내는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그리고,정말 성
진이 참을 수 없어졌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이런 고통
을 안겨 줄 자격이 있는 가 그는.
탱크처럼 씩씩거리며,그를 찾아 나섰다.
도서관 한 구석에 그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
들이 있는데도 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내가 돌진해가고 있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채,책을 들여다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야,이 개자식아!"
그의 얼굴에다 대고 혜정의 편지를 집어 던지며,나는 소리쳤다.
다들 깜짝놀라 우릴 바라다 봤다.
"자 여??다.실컨 갖고 놀다 버린 니 여자 편지다"
뺨이라도 한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다들 바라다보는 시선을 그땐 이미 느끼고 있었다.
도망치듯 달려,달리고 또 달려서,뒷산 중턱까지 달려갔다.
헉헉거리며 토해내듯 울고 있었다. 다 토해내고 싶었다.지긋지
긋했다. 내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성진은 바로 내 뒤에서 지
키 듯 서있었다.
"경진아,이러지마..."
등뒤에서 나를 안으며 성진은 가만히 말을 했다. 오랜만에 느껴
지는 그의 체쥐를 난 알고 있었다. 정말 그리워했고,다시 느껴
보고 싶던 그의 일부가 이거였던 건 아닐까.
"비켜!"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거라고 나는 내게 타일렀다.
"경진아.이제 그만하고 돌아와. 난 니가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걸 알아. 넌 언제나 내꺼야. 도망치지마. 나도 맘이 편한 건 아
니었어. 그걸.......실수라고 말하진 않을께. 하지만 너까지
잃고 싶진,,정말 ,,잃고 싶진 않아...."
"기다리고 있었어...언제고 네가 돌아 올 날을."
"그래? 그?O던가? 근데 난 돌아갈 수 없어. 널 아직도 사랑하는
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그렇지만 돌아갈 수는 없어. 이제..널
믿을 수가 없어. 널 생각하는 만큼 혜정이도 잊을 수가 없어.그
게 날 미치게 해."
"그래..그럼 그 친구에게 가는 거니?"
"그건 니가 상관 할 바가 아니야."
"아니,상관할 게 있어"
"넌 나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거야."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숲에는, 노랗기도 하고,빨갛기도 한,그림자
처럼 말없이 조용하게,해가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