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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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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무중력의 사랑


BY 로미(송민선) 2000-06-11

파주행 시외버스를 타려고,불광동터미널에 도착했을 무렵엔,벌써 오후가 되어가고 있었다. 커피를 뽑아들고 차에 오르고 보니,그 동안 태경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친구였던가 새삼 가슴아렸다.
차창밖으로 스쳐지나는 초가을 오후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나는 한숨쉬며 그 아름다움조차 서러워했다.

태경은 나를 씁슬하게 바라보며,아무 말이 없었다.
반가지 않는 그의 태도가 서운해져서 눈물이 툭하고 떨어져 내리는 걸 억지로 참고 그와 함께 부대를 나섰다.

"이제 오는 거야? 온다길래,,오래 기달렸다."
어딘지 조잡하고 수상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부대근처 카페에 자릴 잡고 앉자 태경은 넉넉하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멀리ㅡ 어딘가 몹시 헤메다 지쳐서 돌아온 누이에게 건네는 듯한 그의 따듯한 인사를 받자 새삼 서러워졌지만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너무 늦게 왔지? 마누라 자리 내 놓아야 할까봐."
"벌써 다른 마누라 생겼어,,딴 데 가서 알아봐 이제."
태경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들으려 하지 않았다. 완강히 버티며 그는 들어주길 바라는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저녁이 늦어져도,부대로 돌아가지 않도록 외박증을 끊어온 태경은 그러나,내가 돌아갈 생각을 않자 곤혹스러워 했다.
하지만 돌아갈 생각이 없던 나는 만취상태가 되도록 나를 방치했다.

여관방에 자릴 잡고 나서,내가 첨 한말은 이거였다.
"태경아,,내가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뭔데?"
"나!,나 박경진.. 나 선물로 너한테 줄께,,우정의 선물이야~"
"싫어,난 너 싫어해."
"왜에?왜 내가 싫은데? 이상하다,,왜 날 싫어하지이~"
천천히,나를 가만히 들여다 보며 아주 천천히 태경은 말했다.
"경진아,이제 그만해. 그만 다시 너에게로 돌아가. 도망쳐도 갈데가 없잖아,너도 알지? 발을 땅에 붙이고 서서 그리고 견뎌.너 답게."
"나 답게?"
"그래..."
'나 다운게 ..뭘까?..히힛. 근데 왜 우린 안되는거니?"
"아닌 건 아니야,너도 나도. 알지?"
"그런가,,아닌가 우리. 참 좋은 사인데,그지?"
"아닌건 아니야."

그래.맞어.아닌 건 아니지이.이불위로 쓰러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그래....아닌 건 아니야. 그.............................지.................................................



성진에게 면회가 허락되던 날,내게 온 그의 주소를 혜정의 손에 쥐어 주면서,난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그녀에게 언니같은 연민을 느꼈다면 너무나 과장된 감정의 사치일까.

그녀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내게 전활 걸어와 병원에 같이 가달라는 말을 했을 땐,난 내 잘못된 사랑의 끌림을 한탄했다.
도대체 내가 왜 늪처럼 끌려들어가야 하는지 모르면서도,어치피 이렇게 해결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서러워했는지도 모른다.

-언니,오빠가 내 배를 그렇게 섬뜩하게 쳐다볼때,애긴 이미 죽었어요. 나도 애기를 오빠를 찾을 방편으로 밖엔 여기지 않았지만,그렇게 불쌍하게 태어나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낳아서 키우긴 제 능력으론 자신 없구요.그렇게 살 순 없어요.전 아기 낳아서 미혼모가 될 수는 없어요. 아기 좋은 데 보내구,다시 좋은데 태어나라고 기도하구.. 전 떠날래요.
울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그녀에게 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그 때의 최선은 그 길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기는,우리에게 상처를 남기고,온 몸이 찢긴 채,떠나갔다.

병원 복도에 앉아서,한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떨리는 두 손을 마주잡은채,나는 나도 떠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정말, 이제,그만 갈 때가 된거야.아기처럼-이라고 중얼거렸었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태경은 없었다.
참담해진 심정으로,나는 멀거니 창밖을 바라다 보았다.
잠시 후 돌아온 태경에 손엔 컵라면 두개가 들려있었다.
"아이구 마누라,참 내가 미쳐. 이거 먹구 속풀고. 첫차 타고 돌아가라"
"........."
"너네 집에서 혹시 나한테 너 여??었다구 떠 넘기시진 않겠지? 아,,떨려.증말 죄없다.난"
"고마워,,,"
"당연하지. 세상에 친구 면회와서 너 같은 앤 없을 꺼다."
"미안하다. 나 잘 할께."
"그래야지,너 앞으로 나한테 잘해.까딱하면 내가 이담에 너네 신랑한테 다 꽈바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 사랑은 이미 무중력상태였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무중력의 안개속으로 내사랑은 떠나가고 있었다.
-이제,떠나는 거야.

혜정이 찾아온 이후 한 번도 쓰지 않던 편지를 마지막으로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하늘이 파랗고 차가왔다. 그에게 마지막이란 인사를 했던 편지는 그에게가 아니라 내게 한 거였다.그리고 그 편지는 그런 대로 오랜 세월을 지나는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