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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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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BY 로미(송민선) 2000-06-09

집 앞 골목 어귀에서,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그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고,아무것도 듣고 싶은 것도 없었다.이렇게 늦은 시간,나를 찾아 와준 그에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하고 있었다.
한 발 다가가자,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경진아, 할 말이 있어."
"...."
"경진아,사랑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기쁨,누구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기쁨,그저 그렇게 세상이 거기서 끝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바랄것이 없는 기쁨이 있었다.
두 손을 들어 가만히 내 얼굴을 감싸고 내 감은 두 눈에 입맞추고 있는 이 사람,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그에게 안긴채 그런 생각을 했다.누가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그를 내 주지 않겠다고.

"가 봐,너무 늦었잖아"
"할 말이 있어서 왔어,해야 돼."
"오늘은 듣고 싶지 않아,다음에 듣고 싶어"
"아니,오늘 해야 돼."
"제발,,제발,듣고 싶지 않아"
"들어야 돼,경진아 들어줘야 해"
나는 포기 한 채 말했다. -해 봐 그럼,들어보자구,오늘은 정말 듣고 싶지 않지만 들어줄께..
어릴 적에 친구들이랑 함께 깔깔거리면서 뛰어 놀던 동네 놀이터는 아무도 없이,빈그네에선 유년의 내가 웃고 있었다.
"해 봐,그럼."
"혜정인, 경진아,그 아인,불쌍한 애야."
"그래서?"
"내가,현장에 나간 거 너 몰랐었지. 하지만 어설프게 그러는게 아니었어. 혜정인 거기서 만난 애야,너무 힘들어 하는 걸 위로해 주다 보니,,,오해를,,,하지만 경진아,위로해 주려는 것 밖엔 아무것도 아니었어.혜정이가 사랑이라고 오해한거지.사랑이 아니라고 했지만,변한거라면서,너에게,찾아 간거야"
"오해하게 한 거겠지"
차츰 냉정해지고 화가 나는 날 느꼈지만,침착해지려고 애썼다.
"경진아,제발..."
"그런 삼류소설같은 얘기 듣고 싶지 않아. 너 아니라도 선배들한테서 그런 얘기 수도 없이 들었어. 뭐? 노동현장에서 누굴 해방시켜? 그런다고 꼴깝들 떨구 나가서는 멀쩡한 여자애들 장난감처럼 갖구 놀다가, 피 같은 돈 갖다 쓰는 것두 모자라서,버리구 온다구?"
"사랑이 아니었다구? 위로라구? 그렇게 비열한 인간 이었어?니가 처리 못하니까 내게 떠 넘기려구 내 이름 넘겨 준거 아니었어? 내가 너한테 뭔데? 나한테 왜 이렇게 잔인한건데?"
"경진아,내가 사랑한는 건 너뿐이야.네게 말 하지 않은 건 너까지 상처 받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였어."
"눈물이 나게 고맙군,그래. 근데 사양할 수 밖에 없겠다.너한테는 돌아가야 할 여자가 있는거 아냐?"
"그러지마,그러지마 경진아..."
그의 눈물. 그의 고통스러운 눈물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거기서 그의 눈물을 바라보면서,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 부터 느꼈던 대로,그를 용서 할 수 밖에 없었다.
"성진아,그러지마. 내가 사랑한 니 모습은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널 어떻게 사랑한 줄 아니...니가 처음 과대표 후보로 나섰을 때,환하게 웃으면서 니 소갤 하던 때,니가 빛처럼 내게 다가왔더?O어.커다랗게,환하게. 그렇게 자신감있구 당당한 니가 좋았어.제발, 이런 모습 보이지마."

그 밤에 난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다짐했다. 성진에겐 성진의 몫이,나에겐 내 몫이,그리고 혜정에게도 자신의 몫일 뿐이라고.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도와 줄 수는 없는 거라고.각자 자신의 몫일 뿐이라고.

성진이 다시 돌아 온 후에,우리 둘의 사랑은 평온을 되찾았다.나에겐 성진말고도 해 야할 일들이 있었고 성진도 무슨 생각에선지 도서관에 틀어박혀 이른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시간이 나면,학교 뒤 숲에 앉아,도시락을 나눠먹고,이어폰을 귀에 나눠 꽂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시를 읽어주기도 했다. 둘 다 강의가 없는 날엔 종일토록 버스를 갈아타고 돌아다니면서 얘길 나누거나,지하철 2호선을 뱅뱅돌면서 재밌어 하거나,근교로 데이트를 떠나기도 했다. 태경은 그런 나와 성진을 모른 척했다. 사랑은 숨길 수 없는 것이어서,현애나 유정에게는 시시콜콜이 성진과의 얘기를 했지만,태경은 완강히 듣기를 거절했다.
"바람난 마누라 얘길 누가 듣고 싶어하겠냐"
"지는?"
"난 남자잖아?"
"난 여자야!"
"됐어,가봐"
아무런 일이 없이,그렇게 세월이 흘러줬다면,지금쯤 난 성진과 결혼을 했을까.그의 아내가 되어,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그리고 바가지를 ?J어대면서,그렇게 늙어가고 있을까.

혜정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건 성진이나 태경이 군에 입대한 다음 이었다. 애인을 군에 보내는 심정,다시는 못 만날 곳으로 그를 보내는 것처럼 법썩을 떨며 그를 보내고,매일 같이 번호를 매겨가면서 그에게 편지를 쓰고,때로는 편지 사이에 레모나나,껌같은 걸 붙여보내면서 힘들 때 먹으라는 애교섞인 위로도 하고,그를 면회 갈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하면서,그리움에 가슴저려하고 있을 때였다.

"야,,물어 볼 게 있어."
"뭔데?"
"성진이 군에 갈 때,너 안아 보자구 안그러데?"
"뭐라구?"
현애랑 유정은 정말 더 이상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는 듯이 나를 붙잡아 앉혀놓고 심문을 시작했다.
"미쳤어?"
"왜 미쳐? 사랑하는 데,니들 나중에 결혼할 사이아냐?"
"성진이 그런 애 아냐."
"그런 애라니?사랑하면 그러구 싶은 게 당연하지.안 그런게 이상한 거 아니야?"
"나를 사랑하니까 지켜주고 싶어한 거지,니 들 사상이 불온해."
"얘가,누굴 뭘로 몰고 있어? 그럼,키스정도? 아님,허리 상학적인 것만?"
" 아,시끄러,알려구 하지마."
"어이구 더러워라,너 나중에 나 시집간 담에 첫날밤 얘기 해주나 봐라."
"듣고 싶지 않아,내가 먼저 갈텐데,뭘?"
그렇지 않았다. 현애는 졸업하자마저 정말 제일 먼저 시집을 갔고 유정인 서른이 되기 전에,그리고 마지막이 나였다. 인생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게 인생이 아닐까.

헉헉거리면서,후배가 나를 찾아 카페에 들어선 건 그 때였다.
"언니,누가 언닐 찾아 왔던데?,여기 있었네요. 언니 친구라면서 찾아 달라구 그러던데?"
"내 친구?"
"네,윤혜정씨라구..저기 리네에서 기다린다구 전해달래요"
"누구?"
"왜요? 모르는 사람이예요?"
"아냐,응 됐어,고마워.수고했다."
후배가 사라진 후 먼저 말문을 연 건 유정이었다.
"야,걔,전에 성진이 찾아왔다던,걔 아냐?"
"어,,그래.그지?걔지? 어머,무슨 일이야?"
"갖다 올께"
"야,우리 여기서 기달릴께..갖다가 여기루 와?응?"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막상 그녀가 다시 나를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무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구석자리에 박힌 듯이 앉아 있었다. 너무나 작고 가여워 보여서, 예전에 그녀 모습 같지가 않았다.그래도 그 땐 어딘가 당당해 보이던 그녀였는데. 저렇게 안쓰러운 모습으로 변한 건 성진 때문일까. 하지만 첨 만났을 때 처럼 그녀는 생각외로 당당했다. 그녀가 초라하다고 느낀 건 나의 오만이었다.
"언니,안녕하세요."
"언니라뇨?"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까,,,"
"그런가요..."
그녀에게 까닭없이 적의를 가지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쓰면서,
차 주문을 하고,마음을 가다듬었다.
"성진이 오빠는..."
"그걸 왜 내게 묻죠?"
"그럼 누구한테 물어요? 연락이 안되는데,꼭 만나야 되는데.."
"성진이랑 끝난 거 아니었어요? 성진이 군에 갔어요."
"오빠가 연락이 없어서...그?O군요."
"혜정씨,성진이한테 미련이 남아 있어요? 성진인 이제 혜정씨하고 끝났다고,아니 그보다,사랑한 게 아니라고 그러던데요."
잔인하게도,하지만 잔인한게 없는 희망보다는 낫다는게 내 생각이었다.
"오빠가 그렇게 말 했나부죠? 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닐꺼예요. 나두 알아요. 오빠가 언니 사랑한다는 거. 하지만 나도 사랑한다구 그?O어요."
"그랬을 지도 모르죠. 그래서 지금 어쩌라는 거에요?"
"언니,언니만 아니면 돼요."
"뭐라구요?"
"언니만 아니면 오빤 내게 돌아올 수 밖에 없어요."
"내가 아니라두,성진인 돌아가지 않아요"
"아니요,제게 돌아와요,그럴 수 밖에 없어요."
"혜정씨,이런 말 잔인하지만,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언니,오빠랑 잤어요?"
"....."
한 순간에 그 애한테 정말 질리는 느낌이었다.하지만,그 애의 다음말을 벌써 듣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난 괜찮아. 속으로 벌써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안 잤죠? 난 오빠랑 잤어요."
"그래서요? 그 게 어쨌다는 건데요?"
비웃듯 내가 말하자 그녀는 잠시 당황하는 거 같았지만 어쩐 일인지 기죽지 않았다.
"혜정씨도 성인 아닌가요,그래서요,같이 잤으니까 어쩌라구요?내가 물러나 주길 바라는 모양이죠? 하지만 아니예요.그런다고 성진이가 혜정씨한테 갈 것두 아니구,그건 두 사람 문제일 뿐,설마 그런 걸로 발목을 잡으려는 건 아니겠죠.혜정씨만 상처 받을 텐데요?"
"언니가 모르는 게 있어요."
"알고 싶지 않아요"
"오빠는 얼마 전 까지도 가끔 날 찾아 왔었어요.내가 잘 지내나 안쓰럽다구. 군대 간단 말은 안했지만,언니 얘기도 했어요.언니랑 헤어질 수 없다구요. 언니를 사랑한다구요. 더 상처줄 수 없다구요. 나도 오빠를 보내줘야 한다구 생각했었어요. 이렇게 되지만 않았어도요."
"무슨 말이에요?"
"애기가 생겼어요"
그 말은,그녀의 그 선언은,이제 됐지-라고 말하고 있었다.니가 아무리 뭐라고 그래도 그는 내꺼야-라고,그렇게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