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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연인의 다른 얼굴


BY 로미(송민선) 2000-06-07

여름 방학에 다 지나가도록,그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도대체 아무런 약속도 없이 끌려다니는 느낌이 너무나 싫어서,드디어는 내가 그에게 전활했다. 너무나 망설이던 끝에 한 전화를 그는 충분히 반가와하며,사실은 어딜 갔었노라고,오늘 연락하려고 그?O었노라며,,,너무나 반가워 했다.
한 달 가까운 동안에 알 수 없는 불안과 분노로 힘들어했던 난 그 말에 또 풀어져 버렸다.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이해하려고 하지 않기로 했다. 서울역, 그 번잡한 시계탑 앞에서 그를 만나던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중에도 멀리서,그가 다가오는 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 둘이 첨 하는 데이트인데도,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이런 저런 얘길 나누며,마음 놓고 행복해했다. 무슨 얘길 나누었었는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 날의 햇빛,그 날의 바람의 감촉을 나는 기억한다. 해질 무렵, 감미로운 피곤에 물들어진 채,그와 헤어 질 때 그의 아쉬운 눈빛을 난 오래 사랑했다.
잘은 모르지만,다른 사랑하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연락도 하고,만나고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성진은 언제나 내가 참을 수 없어질 때 쯤 되어야 전활하거나,나를 찾았다. 말 할수 없지만 뭔가 일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을 믿어줬고, 나 역시 머리 속엔 그의 생각만 넣고 다녔어도,아르바이트에,교지 편집위일까지 나름대로 내 영역을 쌓고 있었던 터라,많은 불만은 없었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그와 나 서로 언제나 연결되어져 있는 끈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태경은 또 다른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태경은 옛사랑에서 헤어나자 마자,현애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성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태경과 나,현애를 비롯한 몇 명은 항상 어디서나 같이 다녔다. 태경은,내게 오빠나 남동생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인가부터 태경이 현애을 사랑하게 된걸 알아버렸지만,현애는 태경을 친구 이상은 생각지 않는 걸 난 알고 있었다.
"경진아,,,있다가 술 좀 사줘."
"왜? 무슨 일인데?"
"알면서 그러지 말구,,"
"그래,자식,너 그러구 보면 상습적인 거 아냐?"
"매도하지마.."
심각한 태경을 보고 웃지 못할 상황임에도 난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중간에 끼인 처지에 현애에게도 태경에게도 아는 척 하기 힘든 일이었다. 태경이 하소연 하고 싶어하는 걸 알고는 적잖이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 날 성진은 어딜 가 버렸는지 강의실에도 나타나지 않았다.아직 아무에게도,태경에게조차 성진과의 만남을 얘기할 수 없었던 나는,짐짓 모른 척 태경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과 대푠 어디갔어?"
"성진이?,,짜식.."
"왜?"
"넌 몰라두 돼, 근데 왜 관심 가지냐? 서방을 옆에 놓고서?"
"그냥 안보이니까 ...관심은 무슨?"
"도망갔을 꺼다 아마,,,하하"
무슨 말이야?-라고, 더 묻고 싶었지만,강의가 시작되었고,태경에게 더 이상 물어 볼 것도 없이,강의가 끝났을 무렵 알게되었다.
강의실 문 밖에,어떤 여자가 서있었다.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한 말이지만, 한 눈에 공장에서 일하는 아가씨라고 써 붙인 듯한 그녀의 모습은,문 밖으로 몰려나가며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들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쓰며,버티고 서있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누굴 찾아왔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남학생 몇 명은 그녀의 용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녀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 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나였다. 한 눈에 상황이 눈에 잡힐 듯 보이는 데도 난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가려고 주섬주섬 책을 챙기는 사이에,느닷없이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았더라면,얼마나 좋았을까...
성진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그녀에 초라한 모습에 너무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저기 저렇게 힘들게 버티고 서서,자길 피해 도망간 애인을 찾으러,저런 모습으로 서 있는 걸까,저여잔.
"가자,,점심 먹으러,근데 저 여자 누굴까?"
현애가 소근거리며 재촉하지 않아도 난 어서 자릴 뜨고 싶었다. 그 때 태경이 내게 다가왔다. 태경의 눈빛. 전부터 사실은 알고 있었노라고 나중에 태경이 말하지 않았어도, 그 눈빛만으로도 나는 태경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싶었다.
"경진아,저 여자분,널 찾는데?"
"날 왜? 나 모르는 사람이야!"
"무슨..말이야?"
현애는 눈이 뚱그레 가지고서 날 쳐다봤다. 그 여자랑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쭈빗거리며 그러나 당당하게.
"안녕하세요,,,저 박경진씨죠?"
의외로 씩씩하게 그녀가 말했다. 니가 박경진이야?-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그런데요?"
"전 윤혜정이라고 해요,드릴 말씀이 좀 있는데요"
"전 들을 말이 없는데요."
아무런 감정도 실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낮게 얘기했다. 왜 가닭없이 그녀에게 가학적이 되고 싶은 걸까.아무것도 모르면서,왜 그녀에게 화를 내고 싶은 걸까.
그녀는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딱하게 태경을 바라봤지만,태경도,현애는 더욱 어쩔 줄 모르는 거 같았다.
"나 먼저 갈께.실례해요."
다들 남겨 놓고,빠르게 강의실을 나서면서 내가 속으로 한 말은 이게 전부였다.
-이 개자식.....